류재연 수필가

 

 

지금 우리는 인류역사에 전례가 없는 초유의 장수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 수명이 60~70세 때는 별 문제가 안됐다. 노년인구가 급증하는 즈음 전체 인구의 20~40%가 30~40년 동안 의미 있는 목표나 활동 없이 허송세월 한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문제와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준비도 없이 급격히 장수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에 은퇴 후 가야 할 명확한 길이 나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에 대비한 시스템마저도 미미한 형편이다. 전반기에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길은 순식간에 끊어지고 막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해하며 허탈감에 빠지기 쉽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각 개인에게 맡겨져 있을 뿐이다. 후반기 노년도 분명 하나의 미래이며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 직장에는 은퇴가 있지만 인생은 은퇴가 없기 때문에 노년의 삶을 그냥 개탄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 없다. 생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후반기 인생의 삶은 고령시대에 진입한 지금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전반기와 후반기 인생

은퇴 전 60년을 전반기 인생으로 본다면, 보편적 행로는 거의 같다. 태어나 성장하고 배우고 직업 갖고, 가족 이루고, 살다 늙고 죽는다. 인생 전반기에 걸어가는 길과 목적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살아야 하는 시기, 서로 경쟁하며 싸워야 하는 시기다.

적자생존의 경쟁구도 속에 전쟁과 같은 치열한 삶으로 진정한 평화를 찾기는 어려운 시기다. 이렇듯 전반기 인생을 분명한 목표의식 속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지만, 은퇴 후인 60대 이후의 노년기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갈지 불분명하다. 퇴직은 곧 직책과 명예 상실·경제적 능력 상실·건강 악화로 이어진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몸부림치며 평생을 일구어온 목표들이 한 순간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대신 보상해 줄만한 목표나 가치를 잃어버리고 허무와 무기력 속에 살기 쉽다. 목표가 없는 삶은 망망대해에 정처 없이 떠다니는 하나의 배와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후반기 인생이라는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그것도 30년 내지 40년이나 남은 후반기 인생을 무위도식하며 실의 속에 방황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후반기 인생의 관점

변화에 긴장할 겨를도 없는 과정을 건너 뛴 무늬만 그럴싸한 늙음(老化)이야 어쩌겠는가. 정신적 노쇠(老衰)로 먼저 늙은이 되는 게 문제다. 노년의 삶을 쇠퇴기와 퇴보기로 보아 힘들고 외로운 시기로 볼 것인가? 오래 산다는 것이 몸 아프고, 경제적 능력 잃고, 허무감을 느끼며 외롭게 살아가야만 하는 온통 문제투성이의 삶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오랜 경험으로 자유와 여유를 누리며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인생의 황금기로 볼 것인가?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질 것이다.

어쩌다 자식들의 어쭙잖은 효심에 못 이겨 헐값으로 전답을 처분하고 2,3세대가 합친 경우는 또 어떤가? 해 넘어갈 시각을 기다리며 종일 애꿎은 공원 의자를 지키는 노인들이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다. 아파트 출입문을 잠그고 출근한 아들 며느리 손자가 그나마 돌아와야 겨우 집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낯선 얼굴뿐이니, 억울한 생각이 들다가도 그나마 버려지는 쪽에 비하면 오히려 축복이란다.

인생전반기에서 물질적 소유와 권력 명예 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후반기 상실감은 어디서 보충할 것인가? 인생 너무 공허하고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불확실성이 겹겹으로 몰려든다. 그 해법에 오차가 심하다. 문제는 아직 후반기 인생의 갈 길이 명확히 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생의 길이 절반까지만 나있고 나머지 절반은 길이 없는 허허벌판이다.

전반기 삶에서는 경쟁을 통한 성공을 목표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숱한 성공이라는 꼬리표가 다 떨어지고 오롯이 자신만이 남게 된다. 직급이나 직책· 경제적 능력· 사회적 명예도 잃어버린 가운데 자기만의 명확한 인생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인생 후반기를 흐지부지 속절없이 살다가 스러진다. 이것을 대체할 강한 목표의식이 없을 때는 무기력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활력을 찾고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잃어버린 나를 찾는 강한 동기유발 요소나 목표의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후반기 인생, 성공보다는 완성을

연륜이 높은 어른 중에도 자신의 유연하지 못한 고정관념으로 조금 눈에 거슬리는 젊은이들을 보고 '젊은 게 가정교육을 받기나 한 거냐?', ‘왜, 그렇게 예의가 없느냐?’라며 아랫사람 같이 조목조목 따지며 훈계하려 든다. 겁 없는 늙음이다. 과거의 성공시대에 가졌던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던 현실 착각인 것이다.

후반기 인생은 성공보다 완성을 향해서 살아야 한다. 전반기 인생이 외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살았다면, 후반기 인생은 물질보다는 정신을, 몸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 소유하고 집착하던 것에서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할 후반기 인생에서는 누구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결국 성공을 넘어 완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까닭은, 우리 뇌가 스스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일 것이다.

완성은 경쟁을 통하여 소유하고 지배하는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떠난 내면에서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세계다. 자긍심, 만족감, 사랑, 평화처럼 자신의 가슴을 채우는 충만감이다. 인생은 한번뿐이고 되돌릴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천차만별인 정답 뒤에 공통적인 것이 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높은 지위나 어떤 물질적 가치가 아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 자신의 삶이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느낌,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 등이다. 한마디로 내적 만족감과 충만감이다. 인생 후반기는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성찰하고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는 전반기를 거치는 동안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눈 코 뜰 새 없이 허둥지둥 살아왔다. 느긋하게 앉아서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늠할 여유를 갖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책임과 의무가 줄고 여유와 자유를 누릴 기회가 찾아온다. 그럴수록 자신을 규정했던 꼬리표들이 떨어져 나간 것을 애석해 하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열어 환영해야 한다. 이제 우린 연봉이 얼마인지,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 하는 지로 더 이상 평가받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언제까지 끝내야 하고 지시하는 사람도 또 지시할 사람도 없다. 그 전보다 확실히 덜 매이고 자유로워진다. 이제 진정으로 원하는 진실한 나의 모습으로 내 삶의 내용을 스스로 채워 넣고, 속도를 조절하며 살아갈 수 있다. 완성기는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우리가 뿌린 씨앗만큼 거두는 정직한 논밭 아니던가.



●죽음 앞에서

주름이 굵어지고 괜한 소리가 늘고 / 포개진 약 봉지에 세월을 맡긴다. /웃음이 줄고 몇 달 건너 하나 둘, '삭제' 키를 / 떠난 이름들로 가벼워지는 전화기 / 이젠 끝물이다 / 머잖아 내가 지워질 차례다. /

이 짧은 시가 우리 현실 아닌가. 절친(絶親)을 잃는 것처럼 허전한 건 없다. 1년의 투병 생활 동안 근교 한번 다정하게 나들이 못한 채, 50년 지기를 먼저 보냈다. 백세시대 아직 칠순의 문턱도 오르기도 전, 우린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 전화번호마저 지워야 했다. 이렇듯 인생 후반기에는 죽음이 가깝게 따라 붙는다. 가장 근원적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 바로 죽음 아니던가. 노년에 떠올리는 죽음은 먼 미래에 일어날 추상적인 이야기 아닌 현실문제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승을 등지는 것을 보면서 소스라친다.

죽음은 내가 더 이상 선택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운명으로 이해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본 사람에 따르면, 죽어가는 모습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회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고통에 시달려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후회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결국 어떻게 살아왔느냐와 직결된다. 자신의 삶을 총결산하면서 후회 없이 얼마나 가치 있게 살아왔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고통스럽게 맞이할지 평화롭게 맞이할지 달려있다고 본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사실 더없는 축복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낭비하지 않고 잘 쓰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마련된 창조주의 설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으로 보는 지혜 또한 죽음을 준비 할 우리의 몫 아닐까.



●나이 듦의 과제

자식 뒷바라지에 눈코 뜰 새 없던 부모가 거슬리는 존재로 퇴행하니 "저 놈들 어떻게 키웠는데?" 언어 너머로 다른 시름이 깊다. "그러시는 게 아니죠. 부모 잊고 사는 자식들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우린 너무 잘하는 겁니다." 뜨끔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서글프지만 현실을 어쩌랴. 100세 할머니 할아버지도 노인다울 때 비로소 어르신으로 대접 받는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과거에 추구했던 욕망에만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인생 목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길을 여는 것과 같다. 전에 가던 길은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기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생의 주기로 봐서 다행히 노년기에는 자연스럽게 차원 높은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해야 할 일도 줄어들고 욕심도 내려놓기 좋으며 여유로움이 많은 시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살다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여생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돌아갈 것인지 생각한다. 이렇듯 노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순리이고 자연의 순리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적 욕망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추해 보인다. 육체의 리듬과 변화를 따르는 것이 곧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인생후반기에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차원 높은 기쁨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도 진정한 내적 만족을 주고 완성의 삶을 이끌어주는 세 가지를 권하고 싶다.



●나누고 베풀기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삶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이 원하는 진실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졌다. 순수한 자신의 사랑의 에너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내 영혼도 성장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며,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지를 살아오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딱지치기 구슬치기는 유일한 따먹기 놀이였다. 방과 후에 딱지놀이가 시작되면 땅거미 정도는 넘기기 예사였다.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할 딱지였지만 재수 있는 날은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 세상 부자 부럽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잔뜩 소유했던 딱지와 구슬을 동생에게 물려주니 동생이 펄펄뛰며 기뻐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큰 재산을 물려준 것같이 기분 좋은 기쁨을 느낀 기억이 난다. 주는 행복을 일찌감치 체험한 자기주도 학습이었을까?

전반기에서 얻고 받은 것들을 후반기에서는 나누고 베풀 때 조화롭게 인생의 전 사이클이 완성된다고 본다. 나이 70~80에도 계속 외적인 가치 축적에만 집착한 채 욕심으로 살려고 한다면 여유, 평화, 사랑, 행복과 같은 소중한 내면적 가치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우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죽는 순간이 너무 두렵고 불행한 일이다. 가장 큰 행복은 받을 때보다 줄때다. 위대함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해 베풀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노년에는 경제적 능력이 없어 물질적으로 나누고 베풀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마음만은 얼마든지 나누고 베풀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의 약점이나 단점보다는 강점이나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고, 먼저 웃어주고, 유연하고 열린 사고방식으로 부딪침 없이 덕을 베풀며 살 때 어른으로 존중받게 될 것이고, 그것이 자기완성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습관-인격-운명까지 바뀐다.



●지속적인 자기수양

살다보면 어른으로 존중받아야 할 노년에 추하게 추락하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전반기에 하늘을 날던 유명세를 가진 사람들이 인생 후반기까지 과욕을 부리다 하루아침에 비참하게 추락하는 모습들을 많이 접한다. 내려놓지 못하고 움켜쥐기만 하려는 자기 수양이 부족해서이다. 후반기 인생은 생각 넘어 있는 밝은 본성인 양심을 찾아 스스로 갈고 닦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년은 어느 정도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오랜 연륜과 경험을 통해 깨닫기 좋은 시기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받은 통찰력과 지혜로 다음 세대에 삶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맛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알고, 이렇게 인생 이치를 깨우쳐갈 때 우리는 그 속에 심오한 기쁨을 맛본다. 특히 노년에는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같던 인생의 참의미, 자연과 생명의 본질이 하나둘씩 이해되면서 내면에서 자각이 일어난다.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새싹이 돋고 낙엽이 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순간순간 지혜와 깨달음이 찾아온다.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닫겠느냐 생각하고, 인생을 고통이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식으로 대충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면 너무나 억울하다. 죽을 때까지 끝없이 배우면서 완성을 위해 달구어야 한다.

위대한 성인 소크라테스는 ‘나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끊임없이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며 스스로 보상 받는 삶, 진정 멋스럽다.



●자연과 벗 삼아

노년에는 번잡한 도회지보다는 살아 숨 쉬는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흙을 밟고 사는 게 좋다. 인간완성을 향한 영적인 삶을 꾸려가는 노년일수록 더욱더 자연과 가까이 해야 한다. 사람과 관계는 서로 부딪치고 불편한 일이 많지만 자연은 모든 것을 수용하여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나 아픔을 순수한 자연의 에너지로 보듬어주고 씻어준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포용해 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기에 자연과 가장 잘 공명한다. 내 안의 자연과 외부의 자연이 만나 하나로 연결될 때,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일체감을 이루며 진정한 자연과 벗이 된다.

노년에는 모임도 활동도 줄어들고 가까이 지내던 벗들과도 이별하여 외롭게 되지만 자연은 한결같다. 자연은 언제나 무공해 청정에너지를 가득 채워놓고 기다린다.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크게 노력할 필요도 없으며 언제든 누구든 와서 함께하면 된다. 위로와 힐링을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다. 따뜻한 봄날 잔디밭에 누워 풀냄새 맡으며 유유히 떠가는 하늘을 보라. 망망대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해보라.

자연은 우리에게 언제나 사람이 가공해낼 수 없는 무한 사랑과 축복을 선물한다. 가까이 있고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으며 불변의 진리를 가진 만인의 스승이다. 사시사철 변화하는 모습에서 순리를 깨닫고, 세상을 공평하게 비춰주는 태양빛 속에 큰 사랑을 배우며, 피어나는 새순 속에 생명의 경이로움을 터득한다.

자연 속에 있을 때가 어떤 곳보다도 더 자연스러우며 큰 충만감을 느낀다. 마지막 인간이 가야 할 길이 결국 자연이기에 특히 노년에서는 자연을 닮아가야 하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야 한다. 결국 인생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리라. 모든 생명을 품어주고 길러주는 어머니 같은 넓고 너른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자.



●노년세대의 역할과 전망

앞으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고령사회가 되어 노인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노년인구의 급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노년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은 노인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사회에서 노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만은 않다. 돈 없고, 힘없고, 몸 아파서 누구엔가 도움을 받아야 하며, 사고방식도 유연하지 못하고 편협하고, IT세상에 어두워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문제투성이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대부분일 것이다.

노인사회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인가, 퇴보시킬 수 있는 방향인가, 그 열쇠는 전적으로 노인들 의식에 달려있다고 본다. 노인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사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거꾸로 부양세대들에게 부담만 가중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노인들의 의식혁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노인을 중심으로 한 의식혁명과 새로운 문명의 도래가 필요하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고령사회에서 자신의 실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공을 넘어 완성을 향한 차원 높은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새로운 노인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후반기 인생은 전반기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나와 너, 우리, 사람과 자연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인들이 성공보다는 자기완성의 삶에 궁극적 목표로 두고 이를 위한 수행과 생활을 하는 의식 높은 노년의 새로운 문화야말로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완성을 향한 차원 높은 노인문화의 새로운 출발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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