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이 석 우 시인/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이즈하라의 가미자카 전망대 안내판에는 종중상이 초대 도주가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6월 초대 도주 종중상을 부정하는 새 안내판이 세워졌다.“아비류 군대를 토벌한 종중상은 대마도 초대 도주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되어 있던 안내판을 뽑아버리고,“1246년 쓰시마 통치자 아비류를 여기서 격전 끝에 무너뜨려 종씨가 쓰시마 도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역사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역사 연구로 판명되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안내판을 뜯어고친 것은 대마도주의 본관이 '일본인 종씨'가 아니라 '한국인 송씨'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대마도주는 1246년 초대 종중상부터 마지막 도주 종무지에 이르기까지 700년이 넘게 대마도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대마도 어디에도 초대 도주인 종중상의 묘는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대마시가 종가문서를 공개하여 초대 도주의 묘역을 찾아낼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그 의심은 그의 묘가 부산 땅에 있었기 때문에 은폐하려는 의도에 그 까닭이 있다는 결론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동래정씨 문중의 시조 묘역이 있는, 화지산(和池山, 부산 부산진구 소재) 항목에‘구전(舊傳)에 대마도주 종씨의 조상도 이 산에서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정씨의 자손은 큰 벼슬을 맡은 자가 많고, 종씨 역시 대대로 도주(對馬島主)를 세습하니 그 귀함이 비슷하다.’고 되어 있다. 종중상은 대마도 도주의 지위를 평생 누렸으나, 당시의 풍속대로 죽은 후에 시신을 고향인 부산의 화지산에 모신 까닭에 당연히 대마도에 묘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1740년(영조16) 박사창이 편찬한 경상도 동래부지에‘세상에 전하기를 도주 종씨는 그 선조가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 성을 종씨로 바꾸어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과 연맥 되는 것으로 초대 대마도주의 가미자카 전망대의‘아비류 군대를 토벌’한 신화에 신빙성을 한층 높여주는 것으로, 가미자카 공원의 입간판은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려고 새로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종무지는 1908년 동경에서 태어난다. 당시 아버지는 성씨까지 바꿔가며 처가에 데릴사위로 가 있던 터라. 어머니 성인 구로다 성씨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37대 소 시게모치(宗重望)의 대가 끊기게 되자 양자로 1918년 9월 18일 입적하여 38대 도주의 지위를 약속받았다. 10세가 된 그는 대마도 이즈하라 소학교 5학년으로 전입하고 1920년 4월 대마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대마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은 황족과 화족 전용 관립 학교인 가쿠슈인과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덕혜용주와의 결혼한다. 대마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주축으로 기부금을 모아져 엄원8번궁 앞 광장에 높이 3m의“이왕가 종가 성혼기념비”가 건립된다. 그러나 덕혜옹주 부부가 대마도를 떠나가 되자 대마도민은 실망하여 기념비를 쓰러뜨려 풀밭에 엎어 놓았다. 현재의 것은 나중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가미자카 공원에는 덕혜공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종무지)의 시비가 서 있다.“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물고기를 조각하면서 가만히 바다 조류를 본다./그래도 나에게 꿈이 있다./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깊은 밤에 세계지도를 펴고/컴파스를 잡고 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종무지의 시「1964년 新對馬島誌‘序’」전문. 그는 오래전에 대마도주의 지위를 빼앗겼으나 그 끈을 놓지 못하고, 깊은 밤에 대마도를 축으로 컴파스를 크게 돌리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대마도 도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1934년 구전민요를 모아『대마민요집』을 낸 것을 보아도 대마도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걸려 있는 종무지의‘바닷가 배경의 외로운 섬’그림은 자신의 고절한 삶을 외로운 섬 대마도에 투시시킨 것으로, 그의 시에서 “컴파스를 잡고 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라는 진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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