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취학자 문제

따라서 재일조선인 자녀가 취학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재일조선인 측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취학률이 낮았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겠지만, 다나카 논문의 추산을 통해 그 동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위의 표에 의하면 취학률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지만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에도 약 70%선에 그치고 있다.

오사카의 경우에도 1924년의 28%(취학 136명, 미취학 493명)에서 1932년에 48%(취학 3437명, 미취학 3788명)로 상승하고 있지만, 완전 취학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은 낮은 취학률이 광복 전 재일조선인의 교육 상황의 특색이 됐다. 1936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의 취학률은 25%이고, 일본은 99%였는데, 이러한 평면적인 비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있어서, 성장의 모태가 되는 민족사회와 단절되어 있었다는 점이 기본적인 문제였다. 조선의 아동은 일본의 아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취학률 문제는 일본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본적인 지식과 능력을 보다 계통적으로 습득하는가, 어떤가의 문제와 관련돼 있고, 조선인으로서의 민족 형성에 부정적으로 관계되는 질(質)의 문제이다.

단, 이것은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자녀가 생활의 편의를 어느 정도 입수하고 그 대가로서 어느 정도 동화됐는가 하는 일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취학자보다도 미취학자 쪽이 일본 사회에서 살기가 더 곤란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취학 자가 낮은 근본 이유는 재일조선인의 생활이 빈곤했기 때문이다. 1935년 교토 시에서 조사한 미취학 이유를 보면, 응답자 중 약 6할이 가난을 들고 있다. 또 여자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 자가 3할,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1할이다.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피차별 노동과 생활, 여기에 덧붙여 조선에서 생활할 때의 가난한 생활로 학부모 자신이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고베 시의 조사를 보면, 세대주 중에서 미취학자 56%, 배우자 중 미취학자가 89%이고, 취학 경험자의 경우도 9할 이상이 소학교 중퇴자거나 졸업자로 표시돼 있다. 이와 같은 부모의 생활과 교육 상황이 아동들에게 노동을 요구하게 하고, 또 모친의 경험을 매개로 하여 특히 여자 아이의 미취학 증가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1935년 요코하마 시의 조사 보고에는 학부형의 말에 의하면, “학교에 보내면 돈이 들지만 집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서 돈을 벌게 되므로 일부러 돈을 내어 학교에 보내는 것은 쓸데없다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진실의 한 면을 간과한 것이다. 생활의 빈곤이 교육의 빈곤을 낳고, 교육의 빈곤이 생활의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악순환은 자본주의 사회에 보이는 교육의 객관적 사실이고, 이것이 재일조선인 교육 속에 철저히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1935년대에 서서히 취학률이 증가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도, 중·일 전쟁 이래의 재일조선인의 상대적인 직장 학대, 그로 인한 생활 향상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미취학의 근본적인 원인이 궁핍한 생활에 있다고 하더라도, 재일조선인의 경우에는 취직과 임금의 차별이라는 민족 차별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민족 차별이 생활의 궁핍을 낳고, 생활의 궁핍이 민족 차별을 확대 재생시키는 관계가 엄존하였던 것이다. 이 관계가 미취학자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이는 교육 현장에도 관철되어 중퇴자를 속출시켰다. 김희로(金嬉老 1928~2010)의 체험은 그 한 전형일 것이다. 김희로는 시즈오카현(靜岡縣) 기요미즈시(淸水市)의 소학교 3학년 때 중퇴했다. 이때가 1936,7년경이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을 때도 많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보리밥에 장아찌 하나일지라도 꼭 도시락을 싸 주었다. 이 도시락은 반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중에는 도시락과 관련된 차별을 체험한 경우가 많은데, 김희로도 중퇴로 이어진 한 사건을 회상하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도 점심시간에 도시락 때문에 같은 반의 부잣집 아이에게 조롱을 당했다. 나는 “시끄러워! 바보자식”하고 소리쳤다. 그 부잣집 아이가 느닷없이 “뭐야, 이런 시시껄렁한 도시락통…”하며 도시락을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그 때는 나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덤벼들어 그의 팔을 물어 버렸다. 그 아이는 금방 울음보를 터뜨리며 팔이 아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습자선생님이 달려와서 변명을 들으려고도 않고 가죽 슬리퍼로 나를 냅다 후려쳤다. 나는 그 자리에 픽 스러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또 내 배를 걷어찼다. 그 때 어찌나 놀랐던지 그만 똥오줌을 싸버렸다. 선생님은 아파하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부잣집 아이에게 상냥한 말을 건넸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 된 나는 그대로 아픈 배를 움켜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빈곤과 민족 차별이 중첩되는 체험을 반복하고, 소학교를 중퇴한 재일조선인 아동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일본에 건너온 아이들은 앞의 교토 시 조사에서 본 바와 같이, 거기에다가 일본어 미숙이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취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야간 소학교에서 공부하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과 민족 차별에도 지지 않고 통학을 계속한 다수의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보다도 더 빨리 능숙하게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으므로, 그 만큼 빨리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친숙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부모의 생활 상태로부터 미뤄 알 수 있듯이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는 있어서 생활과 노동은 깊이 연결돼 있었고, 광복 이전의 경우에는 그 것이 중요한 생활의 특징이었다. 이는 당연히 취학 방식에도 반영됐다.

재일조선인 아동의 노동에 대해서는 조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통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기록에는 거의 모두가 어린 시절의 노동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두세 가지를 선정해 기록해 보자.

정귀문(鄭貴文)은 1925년에 일본에 건너왔다. 도착한지 사흘 후 인쇄소에 나가 2년간 식자공으로 일했고, 11세 때에 소학교 4학년에 편입했는데 남들보다 2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방과 후에도 가사나 직기(織機) 심부름으로 인해 놀아본 기억은 없다고 한다.

장두식(張斗植 1919~ )은 1923년 8세 때에 일본에 와서 9세 때 소학교 1학년에 입학했고, 4학년 때 엿 장사를 하여 생계를 꾸려 갔다.

김달수(金達壽 1919~1997)는 1930년 만 10세 때 일본에 건너와서 바로 넝마주의, 낫토 장사,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일하였고, 다음 해 4월 심상소학교에 들어간 후 주간의 소학교 4학년으로 전학했다.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조선인 아동에게는 일한다는 것은 지상 명령이었다. 동시에 위의 세 사람은 모두 학년연령이 높은 나이에 취학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도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 아동들에게 현저한 경향이었다. 이것은 광복 이전의 재일조선인 교육을 특색 짓는 하나의 상황이기도 했다. 따라서 많은 학교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동급생과 공부하는 연상의 조선인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재일조선인 아동들에 가장 적합한 교육기관은 초등교육의 경우 야간 소학교였다. 더구나 야간 소학교는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던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는 한층 이용하기 쉬웠다. 1931년의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의 조사에서는 6561명의 소학교 재학생 중 주간은 4231명, 야간은 2230명이었다. 약 35%의 아이들이 야간 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후 재일조선인 취학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기는 하지만, 역으로 야간 소학교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급증하여 야간 소학교는 마치 조선인 학교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도쿄에서는 1940년 현재 7,749명 중 1,875명이 조선인 학생으로 1/4정도를 차지하였지만, 오사카에서는 1941년 야간 재학생 중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80%를 넘고 있다(표 참조).

전교생이 모두 조선인인 야간 소학교도 생겼다. 1935년 당시 濟美 2소학교(재적 아동 149명), 제4 西野田 소학교(110명), 難波櫻川 소학교(126명)는 재적아동 전원이 조선인이었고, 濟美 4소학교는 550명 중 546명, 中本 1소학교에는 246명 중 236명이 조선인 학생이었다. 나고야 시 筒井소학교에서도 1937년 이후 매년 졸업생의 80%이상이 조선인 학생이었다.

이처럼 야간 소학교는 제일조선인 자녀들이 공부하는 중요한 장이 됐다. 중학·대학 수준에서도 야학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포함해서 ‘야학’은 광복 이전의 재일조선인 교육에서 취학 형태상의 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일하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였다.

야간 소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 학생은 주간 소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 학생 이상으로 학령을 넘긴 자가 더 많았다. 시오자와 에이지(鹽澤英治: 도쿄 시 교육국 서기)의 보고를 통해 그 한 단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시오자와는 도쿄의 야간 소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실제 연령은 15세에서 20세 전후인 자가 많다”라고 서술한 뒤, 이어 “이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통계가 없지만, 자활하며 사는 자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입간판 등을 통해 학교 설비를 잘 알아본 후 본인이 직접 학교를 찾아간다. 성적이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대단히 우수하다” 우등생도 많고 “그것은 그들이 매우 향학열에 불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야간 소학교의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상황은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많다는 점, 일을 하여 자활하고 있는 점, 향학열에 불타 고학에 뜻을 두고 있다는 점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인 학생 당사자에게는 이러한 야학이 대단히 고된 일이었다.

그 한 예를 고준석(高峻石)의 체험에서 볼 수 있다. 고준석은 고학에 뜻을 두고 다이쇼(大正) 말에 일본에 건너왔으나, 오사카의 대장간에서 ‘마사키치(政吉)’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3년간이나 노예처럼 부림을 당했다. 참다못해 그는 히가시구(東區) 南大江 소학교 야간부의 실업보수학교(實業補修學校)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료들 사이에 비난이 높아졌다. “그들은 귓속말로 ‘조선인 주제에 건방진 놈 같으니! 모두 일하고 있는데 말이야! 마사키 놈을 야학에 보내주는 부모 마음을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떠들었다. 또 주인은 ‘마사키 놈에게 야학을 다니도록 해 주었으니, 그 만큼 더 많은 일을 해야 돼!’라고 투덜거리면서 불만을 토해 냈다. 그래서 나는 야학에서 돌아와서도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후 11경까지 일하였지만”, 비난이 거세어 결국 1개월 만에 야학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조선인 야학생은 이와 유사한 지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야간 소학교(통칭이고, 정식명칭은 심상소학교)는 일본 근대의 ‘빈민학교’의 역사 계보에 속해 있다. 1872년 발표된 학제 이래, 일본은 가난 때문에 정규 소학교에 취학할 수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2년 내지 3년간의 간이 과정을 특설하였다. 빈인소학(貧人小學), 자수학교(子守學校), 특수소학교(特殊小學校)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반일학교(半日學校)’와 함께 나란히 소학교 야간부는 처음부터 빈민학교의 한 흐름을 이루었고,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오히려 야간부가 ‘빈민학교’의 주요 형태가 됐다. 소위 취학률이 향상되어 소수의 ‘탈락부분’=취학연령을 넘긴 의무교육 미수료자를 구제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야간 중학교는 그 계보를 이은 것이다. 이들 ‘빈민학교’의 역사·야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몇몇 논고를 제외하면 교육사 연구에서 거의 취급되고 있지 않아 공백 부분으로 남아 있다. 재일조선인 자녀들은 적잖은 수가 이 같은 성격의 야간 소학교에 취학하고, 그 학생의 다수를 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의 사회적 구조에서 재일조선인이 차지하는 위치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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