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 교장

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예술을 어버이로 삼아 모든 문화(文化)는 인간사회에 발을 디딘다. 문화는 문명을 잉태하며, 문명은 인간의 모든 양식(樣式)은 낳는다. 그리고 인간의 내,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양식은 다시 예술을 낳는다. 이것이 역사가 취하는 발전적 윤회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먹이로 삼아 자신의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스스로는 다시 사회가 진보해 나갈 에너지를 형성하는 위대한 삶의 고리가 형성된다. 그 양태(樣態)가 바로 예술이며 이를 추구하는 본능을 미학이라 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인간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실존(實存)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 존재로서 이중적 지위를 보유한다. 이를 깨달아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또한 창조하도록 하는 방법이 교육이다.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모든 일은 ‘의사소통’을 유일한 방법으로 채택한다. 따라서 예술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창구이다. 인간의 모든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인식과 그 인식의 뿌리를 자기와 사회를 포함한 모든 사고의 주체와 공유하기 위한 행위는 바로 ‘예술’이란 창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는 매 순간 존재했던 인간들의 예술에 대한 발전적 윤회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발전성의 흐름에 관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일컫는 말이 바로 교육이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of Kos)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우리가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L'art pour l'art.)라는 고티에(Théophile Gautier)의 말을 이 시대에도 예술의 공리성(功利性)을 배격한 표현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추상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면 그 존재 양태를 예술과 동의어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역사를 모든 인간의 자유를 향한 내달음’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고흐(Vincent van Gogh), 그리고 바스키야(Jean Michel Basquiat)를 같은 예술가의 스칼라(Scalar)적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며, 우주라는 공간에서 더 큰 개념에 종속된 것이 아닌 인간 각자의 독립된 존재자체를 실존(實存)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교육을 통해서만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역겨워 하는 것마저도 그가 그러한 인식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관한 미학적 판단을 주관적으로 확정한 것이며, 그가 예술을 혐오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의 생각을 형성시켜 온 미학적 환경에 종속한 것일 뿐이다. 즉, 그 사람의 교육환경의 문제일 뿐이다. 미학과 예술이 이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존재가치를 논해야 하는 그 어떤 형태의 장(場)에서도 이들 용어들의 개입을 쑥스러워 한다. 그 이유는 표피적 자극으로 인생의 본래적 가치를 논하고 무능력을 물리적 편안함과 동일시하는 것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인식하는 관념적 습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다면 그 편안함은 분명 육체적 개념이다. 이것은 교육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주변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예술을 구현할 능력이 분명히 결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가 추구하는 교육과 그 방법에 관한 논쟁이 교육의 본질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언젠가는 꼭 점검해야 한다. 삶은 예술이며 교육이 인간의 모든 양태를 결정짓는 예술이란 창구의 제작행위임을 우리나라의 교육이 인식해야 할 때가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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