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한 여성단체로부터 ‘문학 속의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전 동화책을 다시 펼쳤다. 어린 시절엔 그저 예쁜 공주가 부러워서, 착한 여주인공이 어려움을 겪다가 멋진 왕자님을 만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이 좋아서 동화 구성이나 주인공의 성격에 대한 의문점은 가질 틈새도 없이 빠져서 보았던 동화들이다.

그런데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이 동화들을 다시 보면 문제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외국동화인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나, 우리의 전래동화인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이나 어쩌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을까.

동화 속 신데렐라나 콩쥐, 장화와 홍련은 착하고 고분고분하며 수동적인 여성이다. 부당하게 박해받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반면 계모들은 한결같이 악한 캐릭터로 전통적 여성상과 동떨어진 인물이다. 신데렐라를 괴롭히고 파티에 못가도록 막고, 백설공주를 내쫓고 독사과를 먹게 하며, 콩쥐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붓도록 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잘 생긴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줄거리에 빠져서 책을 읽는 독자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동화 속에서는 한결같이 ‘친아버지’의 존재는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딸들이 학대를 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 계모들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어야 하는가? 동화속 여성들이 행복을 얻는 데는 왜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모두 남성인 왕자들에 의해서 얻게 되는가? 이렇게 옛날 명작 동화들은 수동적인 여성은 착한 여성이고, 능동적인 여성은 악한 여성이라는 왜곡된 여성상을 심어 주면서 순종적 여성을 원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를 강화시킨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학자 바바라 G. 워커는 ‘미녀는 선하고 추녀는 악하며, 여성은 남성이 만든 권력의 그늘에서 안주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고전동화의 공식을 가차없이 무너뜨린 새로운 동화 ‘흑설공주 이야기’를 펴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흑설공주는 계모인 새 왕비와 살았다. 흑설공주는 새 왕비를 좋아했고, 새 왕비도 흑설공주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권력욕 덩어리인 헌터경이 공주에게 청혼을 하자 공주는 거절을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헌터경은 공주를 해칠 마음을 먹고 새 왕비에게 접근하여,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냐’고 물으며 이간질을 시도한다. 공주를 사랑하는 왕비는 물론 흑설공주라고 대답하였고, 헌터경이 위험한 인물임을 감지하여 일곱 난장이들에게 공주를 잘 보호하라고 부탁한다. 헌터경이 공주를 납치하려할 때 난장이들은 공주를 구해내고 헌터경을 감옥에 넣어버린다. 공주는 왕비에게 감사하며 사이좋게 살았고, 후에 마음에 드는 왕자를 만나 결혼하였다. 헌터경은 왕비와 공주에게 앙심을 품은 나머지 감옥 속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써서 퍼뜨렸다고 한다.

마지막 문장은 유쾌한 반전이다. 바바라가 새로 쓴 이 동화는 우리가 읽어 온 백설공주 이야기, 여자는 수동적이고 계모는 전처자식을 미워하며 여자들끼리는 사이가 안 좋다는 그동안의 동화 내용을 통쾌하게 뒤집어 준다. 흑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딸의 미모에 질투를 하는 악녀가 아니라, 딸의 목숨을 구해주고 행복을 지켜주는 이성적이며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전의 묘미가 가장 돋보이는 동화는 드림웍스 필름의 <슈렉>일 것이다. 모든 공주는 예쁘고 모든 왕자는 잘생겼다는 동화 제1의 법칙을 깨고, 저주가 풀린 공주의 모습이 그대로 ‘못생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이런 이유들로 유럽의 몇 나라들은 ‘성차별 동화’들을 교과서에서 퇴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정부는 ‘빨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등의 동화를 유아 도서관에서 퇴출시켰으며, 영국에서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성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동화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러한 동화를 여과없이 읽은 아이들은 자칫 차별과 편견을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 세대의 교육을 위해 이제 ‘약이 되는 동화, 독이 되는 동화’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