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처음 늙어보는 일을 생각하며 / 김정태(수필가)

[동양일보]1. 들어가며

젊음의 한 시절, 키워가던 사랑을 끝까지 키워내지 못했다. 뭉개진 자존감을 추스르기에 용렬함이 앞섰고 아픔을 감내하는 데는 머리를 삭발하는 치기어린 행동까지 뒤따랐다. 웃자란 감수성은 삶의 영원성 앞에서 논리로 정리하기에는 궁핍했다. 같은 상황이어도 아픔이란 것이 본래 개별적인 것이어서 날카롭고 깊숙이 박혀 똬리를 틀고 오래 머물렀다. 핑계 김에 대중없이 마신 소주 몇 잔으로 취기가 오르면 하루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댔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가당찮게 지껄여 댔다.

그 시절 그런 말을 했고 바랐다고 해서 계절을 건너뛰고 세월을 주름잡아 늙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늙음을 생각할 때 20년 후 쯤을 생각했는지, 30~40년 후 쯤을 떠올려 말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버거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성숙하지 못한 감수성의 찌꺼기일 뿐이었다.

아픔을 감내하며 지내던 젊음의 한 시절이 옹이처럼 박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득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아픔이란 기억도 한계가 그어지는 시간 앞에서는 퇴색하는 과정을 진행해 나가는 모양이다. 아내를 만났고, 새 움처럼 돋아나는 사랑을 했으며, 두 아들을 둔 가장이 되었다. 내가 아내를 만나기 전, 아픔의 상처가 구덕구덕 자리를 잡고 속에서 새살이 돋을 무렵의 그 때,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인 환갑을 맞는 해였다. 당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요동도 없는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분이셨다. 그 환갑이란 것을 서너 달 남겨 놓고 있다. 생각해 본다. 잘 늙어가고 있는가? 아니 잘 늙어 갈 준비는 되어가고 있나?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위치는 잘 지켜내고 이웃과의 관계는, 친구와 소속된 모임에서의 위치는, 내가 바라보던 아버지의 느티나무처럼 자식들은 나를 그늘이라도 드리우는 나무쯤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처음 가보는 길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다.

한평생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는 학교에서의 배움이 턱없이 작다. 그러나 80여년의 한 생애를 살아내며, 고되었으나 사랑이 전제된 순결한 당신의 노동으로 대표되는 삶속에서 나의 책상 앞 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할 때가 많았다. 그 점이 지금도 부끄럽다. 나이가 듦은 분명 숫자만의 늘어남만은 아닐 터, 가장 가까이어 가장 오랫동안 보아 온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신의 삶을 생각할 때 순결한 노동의 대가와 죽음 앞에 내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내 늙어감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볼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앞에 숙연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김훈도 ‘늙기란 힘든 사업’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2. 살며, 살아내며

젊다고 하면 젊은이들이 뭐라 할 것 같고, 늙었다고 하면 노인들이 뭐라 할 것 같은 60에 한 살을 보탰다. 60대 삶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 나라에서 6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내남 할 것 없이 모두 애국자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무슨 말장난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나무라지 마라. 괴변만은 아니다. 전쟁의 화마가 채 식기도 전에, 또는 그 7,8년 후쯤 태어난 세대이다. 유교사상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턱없이 부족한 남자들의 자리에 앉혀졌다. 그들은 어른이 되며 가장이 되었다. 여성도 비슷한 숫자의 생명이 태어나 그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많은 생명들이 이 땅에 나왔다. 이들은 자라면서 어느 집단에 가나 주류를 이루었다. 어린 생명이 가장 많이 태어나 정점을 이룬 1958년생은 그 대표성을 갖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오죽하면 ‘58년 개띠’라는 신생어가 유행을 했을까. 어느 집단에 가도 5.8년 개띠는 있었다. 동갑내기들과 경쟁해야했고 몇 년 앞서가고 있는 선배들을 따라 잡아야 했으며, 따라오며 치받으려하는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아야 했다. 앞서 걷던 이들은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후배들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더 뛰어야했고 따라잡기 위해 뛰어가던 이들은 무어라도 잡아타고 따라가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때로 빨리 달리기 위해 더 빨리 달리는 호랑이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호랑이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빠르게 달리는 만큼 한 번 떨어지면 재기불능이 될 만큼 상처를 입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황소도 옆에서 등을 내밀었지만 갈 길이 바쁜 그들에게는 외면당했다. 걷고 뛰고 날던 그들이 지금 60대의 초, 중 반의 나이에 모두 도착해 있다. 그들은 의지를 세워야 했고 의지는 더 강한 의지에 도전 받았으며 그들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비슷한 많은 존재 속에 좌절을 겪는 개체로서의 존재는 한없는 가벼움을 맛보아야 했다. 그 가벼움의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것은 다시 의지를 앞세우고 달리는 몸짓으로 표현 되어졌다. 어느 시대인들 힘겹지 않은 시절이 있었을까마는 내가 살아 온 위아래의 집단들은 그리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60대에 들어서서 어정쩡한 젊은이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다 민망해져 늙은이 집단으로 가보려고 하다가 머쓱해져 이도 저도 못하고 길 위에 서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둘러보고 뒤돌아보며 숨을 고를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넘기는 넘어야 하는데 저 너머는 그들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이고 더 빠르게 가고자 하다가 넘어져, 구겨진 자존감을 되살리기 위해 또 넘는 방법 밖에 배운 것이 없는 세대다. 그들이 지금 60대로 살아가야 하는 낮선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옆을 돌아볼 수 있는 여건도 시간도 인색하기만 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며 주위를 둘러보면 ‘하면 된다.’ ‘중단 없는 전진’ 등의 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하나 이런 말들에 동의 할 수 없는 세대이다. 세상에는 해도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중단 없이 전진만 하라고? 기계고 사람이고 중단 없이 전진만 하면 망가지고 피폐해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 그것이 지금의 60대들이다. 게다가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라는 덫을 덮고 있으며 부양받지 못하는 첫 주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다. 그래서인지 표정이 어둡다. 가정이든 사회의 어느 집단이든 간에 연장자로서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던 시절은 이미 한 세대 전에 끝이 났다.

60대에 접어든 사람들은 요즘 밥벌이의 대열에서도 모두 비껴서고 있다. 이것 또한 자식세대를 위한 명분이 있다니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몸은 건장한데 노인의 대열에 가서 서라는 말에 우물쭈물 거린다. 아직은 내 몸이 젊은이 못지않다고 젊은이 대열 뒤쪽에서 서성거려 보지만 젊은이들은 어르신네 취급이다. 그야말로 낀 세대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이를 앞세워 연장자의 권위를 내세울 수도 없고 건강한 몸을 담보로 젊은이 쪽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머뭇거리다가는 주책없는 어정쩡한 사람으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추레함과 무기력에 스스로 추락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나이 들어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나이 들어가면 모두 늙은이로 변해가는 것인가? 물리적 변화 앞에 늙어감에 대한 본질의 문제에 당착하게 된다.

이 물음은 우문일는지 모른다. 어려운 말로 장식할 필요는 없다. 답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늙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이 들어감을 외면하지 말고 맞닥뜨려 안아야하고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내 것이라고 안고 보듬어야 한다.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상과 시간을 동행할 친구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 따로 나이 따로 가려고 하는 자신을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다.



3. 늙는다는 것, 그 너머의 아름다움

젊음 자체가 항상 좋은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듯 늙음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미래지향적 방향을 잃었을 때에 삶은 진부함에 빠진다. 즉 삶의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고 처진 모습이 젊은이만 보기 싫은 것은 아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60대에 들어선 나이에, 지금처럼 그렇게 해왔듯 푯대를 세우고 앞만 바라보고 목표를 향하여 나가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잘 살아왔든 또 얼마간의 과오가 그려지는 지표위의 젊은 날이든 뒤돌아보고 잘못된 것은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나이다. 이런 말을 전제로 할 때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켜켜이 쌓여간 세월을 필요로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육체의 변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어감을 실감하게 된다. 어느 날 면도를 하며 팽팽하던 얼굴에 주름이 깊어져 조심하지 않으면 베일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앞머리가 벗겨지고 숱이 적어진 것을 느낄 때, 희끗희끗한 털이 보일 때 남자들은 흔히 나이 들어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어떨까. 달마다 찾아오던 손님이 서서히 발길이 뜸해지고 어느 순간에 아예 발길을 끊었을 때 늙음을 실감한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로 나이가 들어가고 늙어가는구나 하고 느끼는 것은 여자든 남자든 삶의 여러 행위 중에 무엇을 해도 의욕이 없고 무엇을 할 생각을 해도 열정이 사라짐을 알아차렸을 때 늙어 감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휩싸여 있다 보면 상실은 상실을 불러 올 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늙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애에서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에 초대받는 귀한 시간들이다. 지나간 과거는 지나간 시간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슬픔이란 것을 놓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십 수 년 전, 40대 중반의 일이다. 이른바 잘 나가던 형은 뇌출혈로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비웠다. 아내는 젊었고 자식들은 어렸다. 맏자식을 잃고 까무러치는 어머니를 받아내며 떠난 형의 옆에 살아있는 자의 몫을 하기에 버거웠다. 만 1년 후 아버지가 맏자식의 간 길을 더듬으며 가셨다. 자식으로는 혼자였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버텨내던 시기이다. 이러한 사별의 아픔과 슬픔이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간다고 서산의 해가 때가되어 스러지듯이 한순간 종적을 감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쑤시는 것 같은 아픔이 무디어져 감을 알았다. 슬픔에 관한 작가 김훈의 말을 빌려본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라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런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작가 김훈이 “슬픔도 시간 속에 풍화되는 것이어서” 라고 말하듯 슬픔이란 것도 풍화되어 없어짐을 느낀다. 없어진다고 해서 붉었던 노을이 산 밑으로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슬픔의 자리를 그리움이 그러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절절했던 사랑도 나이가 들어가며 잊어 가고 없어진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겪어야 했던 사별의 슬픔도 나이가 들어가며 사위어가고 잊어가는 것이다. 그 자리를 그리움이 들어앉는 것인데 젊은 날의 사랑에 매인 그리움과는 다른 그리움이란 것을 느끼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한 것이어서 늙어간다는 것과 슬픔에 잇닿아 있는 그리움의 실체가 늙어감에 와 닿아 있는 것이다. 풍화되어 없어졌을 것이라는 그 슬픔이 그리움이라는 또 다른 슬픔의 모습을 띠고 늙어간다는 것이 인식 될 때, 시간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본질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와 변화로 인한 감정의 이입은 늙어가면서 느낄 수 있는 축복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제 60대에 들어서있는 사람이라고 모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터, 나의 의견에 모두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는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꼭 단언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같은 시간대의 흐름이 지나고 울든, 울지 않든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젊음만 못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슬픔이 풍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면 그 안에는 한 방향으로 표시되어질 수도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늙어가며 느끼는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젊었을 때 스쳐간 시간과는 어떤 관계성을 띠고 있을까하는 생각에 다다르게 한다.



4. 살아 있음과 시간

시간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우리 곁을,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물은 어느 일정한 지점에 멈추기도 하지만 시간은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계속하여 흐른다. 한 인생의 삶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동안에는 시간과 더불어 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것은 물론 물리적인 시간에 국한되는 말일 것이다. 개별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시점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과거의 어느 한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들이 있다면 돌아 갈 수 없는 그 시간을 무한정 늘리고 싶을 것이다. 좋았던 시간은 그에게는 흐르지도 지나가지도 않는 시간으로 그만의 공간속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유한한 것이어서 슬픔이 풍화하고 잊히듯,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도 다가오는 시간에 묻히고 마는 것이다. 젊은 날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늙어가며, 살아있음을 감사할 때 드디어 시간이라는 무게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무게의 중심에 나의 삶이 오롯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며 많은 날들을 보내놓고 어떤 날들은 지루했다고 또 어떤 날들은 너무나 기쁨에 겨워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루함의 시간이나 기쁨에 겨운 시간이나 흘러가는 속도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시계는 항상 일정한 리듬으로 똑딱이며 소리를 냈을 것이다. 개별적인 시간의 느낌으로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리게 지나치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앞에 놓여 있는 시간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비관론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늙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은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늙었다는 것, 혹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영혼의 안에서 시간의 무게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을 말함이리라. 어쩌면 늙음을 안고 늙어감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자, 그 시간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만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다가올 시간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이며 미래에 새롭게 형성될 공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살아보지 못한 시간에 대하여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의 존재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우리 안의 권태와 실증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젊음의 시절에는 그러한 시간들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시간인지 조차 모른 채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늙음은 이러한 침잠된 시간 속에 있음을 알게 하고 그 터널을 빠르게 지나치고 나올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진다. 인생의 길을 걷다 보면 어디쯤에서 땀을 흘려야하고 또 어디쯤에서 흘리는 땀을 씻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 때 쉬어 갈 곳을 찾아 앉아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걸어온 길의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앉아서 뒤를 돌아볼 때에 지나온 굽이굽이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리라. 돌아보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없는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르탕스 블루의 '사막')

시인의 말처럼 한번쯤 해봄직도 한 것 아닐까.

늙어 간다는 것, 이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지극히 개별적인 것이어서 무엇이라 한마디로 말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극히 사견임을 전제로 한다면 그래도 붙들어야 할 것은 사랑이라 말하겠다. 사랑,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일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당연히 관념적인 물음이다. 사랑이란 행위 자체가 관념이고 ‘진정한’이란 한정어가 모호하다. 사랑, 그야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때로는 한없이 숭고한 체 하다가도 어느 순간 모습을 바꾸면 귀접스럽고 든적스러운 것이 사랑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게도 만든다. 이러한 행위들이 곧 우리 삶의 전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사랑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 불가능 그 자체로 숭고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역설이다. 사랑은 깨지지 않는 그릇이 아니다. 깨진 사랑은 고통을 동반한다. 깨진 그릇이 귀하게 쓰던 그릇이면 귀할수록 아깝다. 사랑의 속성이 그렇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상처로 남은 사랑은 깊고 아리다. 그래서 사랑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여하튼 사랑은 빛이고 기쁨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일 수도 있다. 하찮은 것에서 시작한 사랑도 사랑하지 않음보다 존재의 확신을 키우고 자존감의 성장에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 있다면, 나는 권한다. 사랑하라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들은 수명을 다해 죽더라도 젊은 상태로 죽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우리의 삶은 사랑함 속에서만 진정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환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떠남과 밀어냄 보다는 환대하는, 환대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고 이웃이다. 어찌되었든 우리의 삶속에서, 싫든 좋든 늙음의 과정은 있어야하고 죽음을 향하여 진행되는 존재이듯 늙어가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외로움도 뿌리칠 수 없는 실존의 조건이다. 외로움 그 자체를 즐기라는 말도 있지만 어찌 보면 가혹하다. 가혹한 형벌을 자처하느니 이길 수 있으면 이기며, 넘을 수 있다면 이기고 넘는 것이 나은 일이다. 그러기에 늙음이 사랑을 거부할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것을 투명하게 응시하고, 그 상황을 끌어안으며, 그 너머의 세상 보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또 앞으로 나가야 한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한 철학자는 삶속에서 느끼는 피로를 자신의 논리로 이렇게 정리한다. ‘걷는 자가 피곤한 것이 아니라 힘들다고 걷기를 멈춘 자가 피로한 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화를 하나 들추어 보자. 서양의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던 일을 계속한다고 한다. 물론 활동이 가능한 사람을 전제로 함은 물론이다. 심지어 항암 치료를 받아가며 일상의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암 선고를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부터 사표를 내고 주변을 정리한다고 한다. 이렇게 했다고 서양의 암 환자 보다 우리나라의 암 환자가 치료율이 좋다는 보고는 나오지 않았다. 한 예에 불과하지만 시사 하는 바가 작지 않다. 쉬지 않고 앞을 향해 걷고, 달리고, 도약하는 자가 피로를 모른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피로는 수고를 동반하지만 보람이라는, 일의 성취라는 것을 가져다준다. 어떤 면에서 늙어가며 뿌리칠 수 없는, 그리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피로를 극복하는 일은 피로 그 자체와 싸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자는 “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화평이 지극하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늙어가며 어린 아이의 이런 지혜도 참고 해볼 만한 일이다.

그들은 과도함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낭비가 없고 낭비가 없는 까닭에 피로의 외연도 생기지 않는다. 최소화된 삶속에서 충족을 찾아야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논리와 이성에 메이지 말 일이다. 섣부른 지식욕으로 자신만의 틀 안에 앉아서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늙은이 같이 볼썽사나운 것은 없다. 젊은이들은 그들을 어른이라 말하는 것에 인색하다. 돌아서서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꼰대’라고. 이제 60대에 들어서는 사람들이여, 꼰대만은 되지 말자. 잠시 빗나간 말을 했지만, 늙어가며 마음의 피로는 멀리하면 멀리 할수록 좋다. 논리든 이성이든, 실체적인 어떤 규모든, 키우려는 욕망을 버리면 늙음 앞에 버티고 있는 피로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다가오는 마음의 피로는 늙어가는 과정의 가장 못된 장애물일 뿐이다.



5. 나가며

사람은 태어날 때 타인의 고통을 빌리지만 죽을 때는 모든 고통을 오롯이 혼자 감내하며 죽는다. 이것은 불변이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사람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운명을 안다.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닥칠 운명을 자각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중의 하나이다. 의학과 과학이 무한정 발전하여 유전자를 통제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결정 요인들을 연구해서 수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마는 그렇다고 사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 앞에 놓인 운명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이라고 말한 이는 철학자 하이데거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서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다. 잘 삶은 잘 늙어감과 잘 죽음과 잇닿아 있음을 기억하고 살 일이다.

60대의 나이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과 나, 우리는 오늘 살아있다. 내일 보다 젊은 오늘의 삶, 그 속에 죽음이 잇닿아 있다고 해서 고통스런 세상 얼른 죽을 것을 하고 징징거리지 말 일이다. 역설적인 표현일 테지만 어쩌면 죽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사는 일이다. 늙음도 죽음도 내가 지나 가야할 길이라면, 지금 60대에 들어서서, 젊은이도 늙은이도 아닌 경계에 끼어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는 일이 더 급한 일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 내게는 젊은 날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영화배우 제임스 딘은 지금도 나에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글을 쓰며 필자의 얕은 사유의 강에서 건질 것이 턱없이 부족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려 아래의 책들에서 내용을 참고 또는 공감하는 일부 구절을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 김희상 옮김)

2) 늙어감에 대하여 (오도 마르크 바르트, 조창오 옮김)

3) 일상의 인문학 (장석주)

4) 자전거 여행 (김훈)

5) 책은 도끼다 (박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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