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기 논설위원 / 한국교통대 교수

홍연기 논설위원 / 한국교통대 교수

[동양일보]지난 9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정유회사 아람코(ARAMCO)의 석유 처리 시설이 공격을 받았다. 이 시설은 세계 석유 공급량의 5% 이상을 처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처리 시설인데 이번 공격으로 인해 국제 유가가 크게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일부 전문가는 아람코의 시설 가동 중단으로 인해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원유 수입의 약 30%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역시 그 영향을 비켜나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번 아람코의 석유 처리 시설에 대한 공격에 대해 친이란 성향의 예멘 반군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은 그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있다. 물론 이란은 자국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미국과 이란 간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미국은 이란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듯한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우리를 고민스럽게 만든다. 지난해 5월 이란 핵협정에서 미국이 사실상 탈퇴를 선언함에 따라 미국은 이란과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에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을 위협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이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지난 8월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군이란 구상을 내놓으면서 한국 해군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석유와 핵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과의 갈등이 우리 젊은이들의 생명과도 연결된 셈이다. 석유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가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양국 간의 이익 충돌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의 또 다른 원인 중의 하나는 러시아의 석유산업 중심지였던 바쿠(現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혼란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 당시 세계 석유 수출량 중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31%에 달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바쿠에서 생산된 석유였다. 당시 러시아 군주였던 니콜라스 2세의 폭정으로 인해 러시아가 온통 혼란에 빠졌었는데 러시아 석유산업의 핵심지역이었던 바쿠는 생활조건과 노동 조건 모두 최악의 상태였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데 바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을 댕긴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01년과 1902년 사이 바쿠에서 사회주의 조직 활동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거대 자본가였던 로스차일드사와 지역의 석유사업체들을 상대로 파업과 시위를 조직하였다. 1903년 바쿠 지역 석유산업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러시아 전체를 흔들어놓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성을 느꼈고 내심 외부와의 전쟁까지 바라던 차에 1904년 1월 일본이 중국의 뤼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서구 열강의 전망과는 달리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대패함으로써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세력 균형이 깨지고 이는 을사늑약으로 이어져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쥐어 짜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부정부패로 인한 석유산업의 위기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혁명으로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끝난 지 115년이 되는 지금, 국제정세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대응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이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가 과연 기우일까 싶다.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에 파병해야 했고 미국과 이란과의 갈등에 파병을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문제로 촉발된 한일간의 경제적 군사적 갈등, 미국의 대중정책과 북핵으로 인한 한중간의 갈등 등 무엇 하나 아찔하지 않은 것이 없는 작금의 상황이다.

우리의 지정학적 특성, 거기에 석유자원으로 대표되는 자원의 외부 종속 등으로 인해 우리는 국제 문제에 항상 관심을 두고 슬기로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 5000년 역사 내내 지속되어 온 우리의 운명이었다. 다자간 갈등 속에서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았을 때 우리의 국운은 상승했고 반대일 경우는 비참한 결과를 맛보아야만 했던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나라 밖 사정을 항상 예의주시해야만 우리의 운명을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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