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순경 생활을 쉬고 향촌으로 돌아온 김순경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남로당원이 돌아다니며 얼마나 세뇌를 했는지 마을 사람들이 가입하겠다는 들뜬 생각을 품고 있었다. 김 순경은 이를 어쩔까하고 고민에 빠져있는데, 친구이기도 한 위원장이 찾아와 사람들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 오히려 김순경은 작심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절대 가입하면 안 된다고 설득하였다. 그 덕분에 향촌마을 사람들은 보도연맹과 연계되지 않아 당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 하지 않았다. 김순경은 향촌마을에 평화와 복을 가져다준은인이 되었다.

1950년 7월 7일 소수면 벼창고 앞으로 보도연맹원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200명의 숫자가 채워지고 있었다. 점점 면내 보련원 전원의 명단이 채워지고 있는데 김태식 지서장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 지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김태진 의용소방대장도 얼굴 펼 생각을 접고 있었다. 이들이 증평양조장에 구금되고 나면 다시는 고향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설 수 없는 까닭이다.

지서장은 인솔 트럭에 흔들리면서 이 순박한 청년들을 그냥 사지로 몰아넣어야 하는가 고뇌에 빠져 들었다. 트럭을 따라 일어서는 신작로의 흙먼지가 상부의 명령과 인간적 양심을 혼탁하게 뒤덮어 왔다. 보련원 200명이 트럭에 실려 정용마을 냇가에 도착하였다.

김지서장의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장마철이었지만 그런대로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결연한 태도로 트럭을 세우고 예비검속자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소리쳤다. “땀 좀 씻어라. 그리고 도망쳐라, 이제 더 가면 모두 죽는다.” 이 단호한 결정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고 있었지만,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얼굴에는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로 하여 소수면에는 보도연맹 희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이곳에 공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정용다리 밑으로 시냇물만 무심하게 흐른다.

옛날에는 불정에서 괴산을 오려면 감물까지 배를 타고 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1950년 7월 7일 불정면에서 영문도 모른체 소집된 보련원 80명은 배를 타고 고향산천을 등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 때 강둑으로 나도 데리고 가라고 소리치며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멈추어선 배를 겨우 타게 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보련원들은 감물에서 내려 역고개까지 걸어들어 왔다. 그리 높지 않은 이 고개에는 선술집이 있었는데 이 고개를 넘나드는 이들의 애환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인 곳에 주저 앉아 있었다. 괴산 장을 보고 돌아오다 만나는 이웃 마을 친구를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으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가정 대소사도 돌다 보면, 힘겨운 농사일도 자랑거리가 되어 높은 목청 따라 같이 돌고 도는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오래된 느티나무도 흥에 겨운 듯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곤 하였다.

보도연맹 예비 검속자 80명을 인솔하던 김순경은 속이 타들고 있었다. 이 역고개를 넘고 나면 보련원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직행할 운명이다. 그렇다고 지서의 말단 순경의 처지에 내놓고 죽음이 목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뇌하던 김순경은 작심이라도 한 듯 검속자들을 멈춰 세운 뒤, 이제 쉴 곳도 없으니 변소도 가고, 출출할 테니 막걸리를 마셔도 괜찮다는 등 시간을 넉넉하게 챙겨준 후, 애써 시선을 떼고 오래 묵은 느티나무을 올려다 보고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이제 볼 일을 다 보았으니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이 보련원들은 증평양조장에 구금되었다가 옥녀봉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떠난 배를 뒤따르며 소리쳐, 배에 올라 영문도 모른체 이승과의 작별한 목숨을 보라, 얼마나 순진무구한가!. 이 티끌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따라간 보련원들의 죽음행렬을 누가 어리석다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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