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잦은 태풍 끝이라 조바심을 안고 출발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줬다. 좁은 산길을 아슬아슬 돌아 올라가 승합차가 멈춘 곳은 기와집 몇 채가 올려다보이는 마을 초입, 차 몇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터였다.

아홉 명의 회원이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자 떠난 ‘피정(避靜,retreat)’이란 이름의 자체워크숍 목적지다. 청주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한 단양군 지역이라 친근감이 들만도 한데, 느낌상으론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쯤으로 멀게 느껴진다. 황토를 바른 ‘산 위의 마을’ 초가집 조형물이 고즈넉이 품을 내주고 있다. ‘고요하다. 소박하다. 평온하다. 따습다. 아름답다. ’, 주위를 둘러보고 난 첫 느낌이다. 천천히 도는 시곗바늘처럼, 어쩌면 멈춰 있는 물레방아처럼, 종탑은 종탑대로 코스모스는 코스모스대로,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늙은 호박 주위를 맴도는 고추잠자리도 여유롭다. 저녁 햇살을 받아 은실처럼 반짝이는 거미줄도 그대로다.

‘산 위의 마을’은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그런 마을이다.

처음 와 본 사람에게도 ‘고요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워’ 상처받은 영혼과 육신을 그저 가만히 내려놓기만 하면 위로가 되는 고향의 마음을 내어주는 마을이다.

“산 위의 마을 건축은 ‘공동 공간은 넓게, 개인 공간은 작게’의 원리로 설계되어 방이 좁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숙소 배정을 하는 안내담당자의 말이 따뜻하게 들린다.

공동 공간인 거실 한쪽 벽에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다. 첫 번째 사진이 낯이 익다. 톨스토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이 산촌에서 만나다니.

한 줄로 걸려 있는 사진 중에는 일본 이름도 있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눈에 띈다. 모두 공동생활, 즉 공동체운동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거나 영향을 끼쳐 온 선각자들이라 한다. 이곳 단양에서 무소유의 신앙공동체 ‘산 위의 마을’을 일구며 상주하고 있는 박기호 신부는 그의 저서 ‘니콜라오와의 대화’에서 톨스토이와 공동체의 관계를 설명한다.

- ‘산 위의 마을’의 영성과 신념이 톨스토이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톨스토이 사상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 산업화와 혁명이라는 세기적 문제와 과제들이 압축된 당대에 대안의 삶을 제시했던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치유를 갈구하는 우리 시대에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밭에 묻힌 보물’이다.

맞다. 이웃과 함께 하는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여겼던 톨스토이의 영성과 공동체 정신은 그가 자신에게 던진 세 가지의 근원적 질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가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온전히 하루도 안 되는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이곳에서 만난 ‘산 위의 마을’ 가족들이 그러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만날 때마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배려하며, 누군가의 일을 내 일로 여겨 묵묵히 쓸고 닦고 챙겨주는 모습들이 감동적이다. 두 가정과 독신 남녀를 합쳐 스무 명 남짓한 소공동체지만, 하늘과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여유로움이 생활 곳곳에 배어 있었다. 불편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넉넉한 심적 공간으로 확장돼 일상의 성찰 속에서 얻어지는 진리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교사가 지탱하고 있는 분교의 상황이 안쓰러워 묻는다.

언제까지? 중학교는? 문제는 있지만, 문제가 아니다. 그럴 것이다. 공동체 대안학교인 ‘꼬뮌스쿨(Commun School)’이 있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배움터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훌륭한 교사다. 이곳이야말로 그림 속 동화처럼 마음껏 색칠하며 성장할 수 있는 지혜와 진리의 산실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지상에서 천국처럼!’ 입촌 인사말의 첫 구절이다.

‘산 위의 마을’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늘 그리워하는 고향 마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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