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노철개벽 일기(老哲開闢 日記)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 2



6月25日 23:12

일본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먼저 놓고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0년이나 일본에서 살고 공공철학 교토포럼을 중심으로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들의 견해도 그랬고 또 많은 책들을 읽는 가운데서도 대체로 같은 성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죽음-삶-죽음 또는 무-존재-무 라는 이미지다. 그래서 사생관(死生觀) 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거나 아니면 써 놓은 글이나 책들을 살펴볼 때 압도적으로 삶-죽음-삶 또는 존재-무-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일본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강한 것 같다.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한다는 생각이 있다.. 기독교인은 영생이라는 신념으로, 그리고 뚜렷한 종교가 없는 사람도 윤회전생 - 반드시 불교에 귀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 과 같은 것을 믿는 것 같다. 내가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본 일본인의사는 허무에서 나와서 다시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이며 그것이 깨끗하고 산뜻한 사생관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나의 견해를 알고 싶다고 해서 나는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 – 개체적 근원적 생명력 –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죽으면 허무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 – 무가 된다 - 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주생명이 나라는 한 몸과 마음과 얼에 들어와 그것들을 살려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하다가 어느 기한이 지나면 몸과 마음과 얼이 유기적 상관연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개체생명은 끝을 내고 본래의 우주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다만 사람에 따라서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인격화해서 하느님, 하나님, 하늘님이라고 말하기도하고 원기, 지기, 생기라고 호칭하기도 한다고.

요즘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도 허무이고 죽은 다음에도 허무라고는 생각치 않고 태어나기 전이다 죽은 후에 우주생명이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하는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태어나서 얼마동아 살아 있다가 다시 왔던 곳 -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극히 자연스런 일인데 다만 사람에게는 인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태어남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가까이에서 살고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은데 삶과 죽음 - 아니 일본식으로는 죽음과 삶 - 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 일본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사들이 지배했고 무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늘 죽음에 대한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이 일반적인 사회의식의 심층에 침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6月25日 23:23

continued from the previous post....

한편 대표적 한국인은 선비였고 그들에게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값지고 귀하게 갈고 닦아서 바람직한 사람됨 - 인격형성 - 을 이루느냐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먼저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신 선조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후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의 모습이요 뜻이요 가치라는 의식이 강했고 그런 의식이 일반 민중속에도 침투 된 것이 아닌가 싶다.



6月26日 17:50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소위 노년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에 관한 논의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뚜렷한 추세는 "건강한 노년"으로 수렴되고 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는 "무병장수"가 있다. 극히 상식적인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 - 노년세대 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나 중장년 세대까지도 -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 유일한 노년상인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한 노년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허무하고 지겹고 서러운 나날을 보내느라 힘겨워하고 있다는 데 있다. 쉽게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거나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상의 생활 자체가 여유롭지 못한 가난한 노년의 고통과 비애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어두운 측면이다.

바람직한 노년상은 건강, 무병, 재산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보람과 뜻과 기쁨과 설레임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한 노년"이다. 그래야 다른 모든 조건들 - 좋은 조건은 물론 나쁜 조건까지 - 이 긍정적 상승 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젊을 때에는 불운과 불행과 역경을 이겨내서 삶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의지와 여유와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나이듦에 따라 그런 것들이 약해지고 작아지고 희미해진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나이 듦과 거기에 따른 불편, 고통, 비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느냐는 개개인의 마음가짐과 뜻세움과 행복 찾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건강한 노년, 무병한 노년, 풍요로운 노년 - 다 바람직한 노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 보태서, 아니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행복한 노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떨까? 행복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주관적인 체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중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인 접근이나 연구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지하게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6月28日 9:06

오랫동안 장수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재난으로 여기는 풍조가 거세다.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삶 자체가 기적이요, 축복이요, 따라서 그저 감사, 감동, 감격할 일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반드시 태어나서 85년씩이나 살게 되어야 했다는 이유나 근거나 가치가 없잖은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찍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중병을 앓은 적도 있고 전쟁을 겪기도 했고 6.25 전쟁 때는 피난 가는 길에서 북한인민군에게 체포당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남았다.

아픈 때도 있었고 괴로운 때, 슬픈 때, 답답한 때도 있었다. 기쁜 때, 즐거운 때, 가슴이 벅찬 때도 있었다. 오랜 삶을 통해서 체험, 체면, 체득한 바가 너무나 많고 귀하기 때문에 그저 무조건 고마울 뿐이다. 이 값진 삶의 기회가 이렇게도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데서 하늘의 특별한 배려를 체감 할 수밖에 없다.

오랜 삶은 커다란 축복이기도 하지만 엄중한 명령이기도 하다. 도덕을 지상명령으로 본 철학자도 있었지만 나는 삶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도덕도 삶이 있고나서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말에 100% 공감 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나이 들어간다. 고로 나는 깨닫는다.” 라고.

젊어서는 열심히 배우고 새로운 것에 대한 지식이 늘어난다. 그러나 오래 살다 보면 몸과 마음과 얼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나이 듦을 통해서만 감득 할 수 있는 것을 선취할 수는 없다. 태어날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고 무르익을 때가 있는 데 품질이 좋다고 해서 무리하게 때를 앞당기면 설익거나 일찍 고사하고 만다.

삶이란 탄생과 사망사이에서 몸과 마음과 얼이 부르는 노래다. 속삭이는 이야기다. 읊조리는 시다. 우열을 따질 수 없이 저마다 유일무이한 삶의 참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오랜 삶은 살아온 만큼의 내용이 담긴 것이 될 테니까.



6月29日 22:40

장수(長壽)는 제3의 개벽이다. 우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인간탄생이 제 1의 개벽이다. 인간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법정연령이 되면 개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교육을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学과 習과 思와 行의 과정에 들어간다. 여기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새로운 자리매김과 뜻매김이 이루어진다. 제2의 개벽이다.. 그리고 오래 살다보면 아주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됨을 실감하게 된다. 제3의 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벽이란 새로 열린다, 또는 새로 연다는 뜻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인 동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또는 그런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혼란, 혼돈, 혼잡을 수반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개벽은 개신이요 새밝힘이다. 장수는 아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몸과 마음과 얼이 근본적으로 재조정되는 것이다 큰 변화가 일어나고 또 일으켜지게 된다. 물론 아픔과 괴로움과 쓰라림을 겪게 된다. 몸과 마음과 얼이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아픔이요 괴로움이며 쓰라림이다.



6月30日 9:36

청소년 시기는 주로 선배세대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고 익히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름을 알고 거기에 나타나는 모습과 뜻을 점진적으로 깨닫게 되어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시기다. 이것이 제 1의 개벽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活学開闢 - 배움을 살려서 세상을 여는 - 시기다. 배우고 익힌 바를 잘 응용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사람을 나름대로 새롭게 살리는 것이다. 중장년 시기는 체험, 체득, 체인된 앎 - 識-을 활용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새롭게 뜻매김,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것이 제 2의 개벽이요, 活識開闢이다. 장수는 식(識)이 열어놓은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시기다. 이것이 제3의 개벽이요, 오랜 삶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게 된 근원적 생명력이 내면의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의 근본적 변혁을 이루어 가는 活壽開闢 이다. 그래서 장수는 제3의 개벽이라고 하는 것이다.



7月1日 8:54

오늘의 한국사회는 노년을 폄하하는 폄노의 사회이며 노년을 업신여기는 모노의 사회이며 노년을 죽이는 시노의 사회이다. 그것은 오늘에 이르는 오랫동안 많은 노년들이 인색한 노년이었고 완고한 노년이었고 시들고 쇄약하고 민망한 노년이어서 그저 짐만 되고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 노년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나 중장년세대를 탓하고 섭섭해 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모두가 경축할 노년이 되고 어디서나 덕이 되는 노년이 되고 삶이 저주스럽기보다는 축복임을 느끼게 하는 노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그래서 노년이 특히 유념해야할 점은 속 좁은 노년이 되지 말고 보기 추한 노년이 되지 않으며 고루한 노년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혐오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근대화초기에는 노년세대와 청년세대사이에 대립, 갈등, 분쟁을 원동력으로 삼아 구시대의 사회의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했다. 그래서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 합리화, 경제중심화, 황금 만능화를 강화 발전시켜오는 동안에 백인청년남성중심의 가치관, 세계관, 인간관이 압도적인 인식과 실천의 판단기준이 되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여성과 아동과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파급, 공유되는 가운데서도 노년만은 차별, 소외, 방치되어왔다. 노년이 청년을 지배하고 청년이 노년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인간적 미덕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허울 좋은 도덕적 명분일 뿐 실상을 캐보면 철저하게 차별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처리되었다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확증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긴급한 과제는 급속도로 늘어나는 노년을 사회경제적 부담이 아니라 활용가치가 높은 고품질의 자원, 자산, 동력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지혜, 안목, 도량을 기르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숙년 세대의 년공 - 나이듦에 따른 내공 - 의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기풍이 조성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



7月2日 0:10

나는 어렸을 때의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나하고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젊어서도 삶이 즐거웠다는 말이 안 나온다. 내게 있어 인생은 늘 힘들고 버거웠다. 뜻밖의 행운이나 굴러들어온 복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조롭게 되거나 힘 안들이고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반드시 거기에 맞는 노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은 것이다. 한마디로 힘겹게 살아왔다. 그래서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크게 이룬 것이 없어 아주 평범한 삶을 이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다. 어쩌다보니 여든다섯이 되도록 살아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나는 지난날의 어느 시기 - 청소년기나 중장년기 - 보다 신체적, 정신적, 영성적 건강이 좋고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고 밝은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삶이 활기차게 된다.

조금 더 소상하게 이야기하면 50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일본사람들과의 협력을 중심으로 세계를 다니면서 장래세대의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현재세대가 무엇을 어떻게 할 필요가 있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실천과제를 설정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실행에 옮기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60대에 들어서면서 공(公)과 사(私)와 공공(公共)의 문제에 대한 문제관심을 공유하는 일본사람들 - 학자, 언론인, 종교인, 시민운동가, 경영인 등등 - 과 함께 공공철학대화운동을 전개하고 그 결과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미래세대에 대한 현재세대의 세대계승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자는 뜻에서 공공철학 교토포럼을 개최, 운영, 확장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는 동안에 80세에 이르렀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 사람이 칠십까지 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 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틀림없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값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나이 듦의 의미와 가치와 사회적 기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청소년세대와 중장년세대와 함께 뜻과 힘과 열을 다해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장수의 보람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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