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의례 ‘시월의 마지막 밤’ 노래가 떠오른다, 노래 제목은 ‘잊혀진 계절’이지만 ‘시월의 마지막 밤’이란 가사가 더 익숙하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나에게 꿈을 주지만/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나를 울려요.‘

누구로부터 잊히어진다는 것이 슬픈 일일까. 잊혀진 상태를 되돌릴 수 없어서 ’꿈‘이 된 사실이 슬픈 것일까. 아마도, ’잊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쓸쓸함이 가을 감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잊혀진 다는 것이 꼭 슬픈 일은 아니지 싶다.

서독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는 ‘망각은 은총인 동시에 위험이다’라고 ‘잊혀 감’에 대한 속성을 설명한다. 어차피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서로서로 잊혀 가는 존재로서 관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치매와 같은 질병이 아니라면, 망각은 위험보다는 ’은총‘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기적 같은 일상도 기억 함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잊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축복인지도 모른다.

엊그제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인데도 지난 추석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성묘를 미루게 됐다. 예전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잊혀진 조상’보다 ‘살아있는 후손’ 쪽에 손을 들어주는 세태를 핑계 삼아 차일피일 늑장을 부린 것이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만도 ‘사람의 죽음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의 문제다.’라고 확실한 편이 돼주지만 죄송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조성된 지 30년이 지났으니 어림잡아도 수천 기가 넘을 터인데 ‘산 자들’의 발걸음은 한가롭다. 묘지 석 둘레 드문드문 웃자란 잡초를 뽑다가 묘비에 새겨진 ‘생몰년(生歿年)’에 마음이 쏠린다.

“우리 막걸리 한잔할래.” 생전에 며느리랑 막걸리를 즐겨 드셨다던 어머니, 새댁 꼭지가 여물기도 전에 돌아가신 30년 전 시어머니를 추억하며 며느리가 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있다. 아버지가 백일도 못 돼서 할아버지는 40년 인생을 끝맺고, 이어진 할머니의 47년, 고단한 청상(靑孀)의 길도 1976년 (음) 8월 29일 ‘졸(卒)’로 끝이 나 있었다.

영겁(永劫)이란 시간의 길 위에서 ‘생(生)’과 ‘졸(卒)’은 찰나의 쉼표에 지나지 않는다.

‘할머니.할아부지-엄마.아부지’ 앞뒤로 나란히 누워계신 묘소 앞에서 태연하니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이 세상 밖 생각을 하게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잠깐의 미래로 날아가 보면 돗자리 위의 배우들만 바뀌어 있을 뿐, 우리 역시 어딘가에 누워 같은 배역을 맡고 있을 것이다.

단풍이 절정을 치닫고 있다. 올해도 단풍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되도록 끊임없이 ‘잊혀진 계절’을 얘기하고 있다. ‘잊히어 가는 것들’을 대표하는 계절의 오마주(homage)가 단풍이 아닐까 싶다. 사실 단풍은 전 생애를 걸쳐 우리의 삶과 너무나 흡사하다.

씨앗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나무로 성장하면서 ‘잎’은 생존의 과정이며 삶의 일상이 되었다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힘겹게 붙들고 있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둘 내려놓으며 ‘단풍’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좋든 싫든, 엄정한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시간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아름답게만 보던 단풍의 범상치 않은 생애를 알고부터 예사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겨울에 햇빛이 부족해서 영양소를 만들어 내기 어려운 나무를 위해, 잎은 스스로 가지로부터 받는 영양분을 차단하고, 엽록소가 덮고 있던 다른 색소들이 드러나 소진되기까지 슬프도록 아름다운 ‘단풍’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가지를 떠난 낙엽의 춤사위가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은 자신의 온 생을 지탱해 왔던, 나무의 발치께다. 추운 겨울 동안 뿌리를 덮어 줄 이불이 되기 위해서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잊혀진 계절’의 쓸쓸함보다 떨어지는 단풍의 마음을 헤아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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