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여기 무대 위에는 여러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호흡합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여기는 여러분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이 글은 연극대사다.

더 풀어서 말하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오스트리아 작가 피터 한트케의 연극 ‘관객모독’에 나오는 대사다. 아무런 세트도 도구도 없는 무대에서 네 명의 배우가 나와 각자 자신의 대사를 읊지만 배우들은 이렇다할 형식이나 메시지를 지닌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관객들과 공존할 뿐이지 관객들이 기대했던 사실극의 배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연극대사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러분은 방관자로 선택된 것도, 구경꾼으로 선택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관객이 됩니다. 여러분은 청중이 됩니다. 여러분은 무감각해집니다. 여러분에겐 눈과 귀만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시계 보는 것을 잊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잊게 됩니다. 여기 위쪽 무대와 아래쪽 객석은 더 이상 두 세계로 나누어지지 않고, 통일체를 이룹니다.

어떤 경계선도 없습니다. 이곳엔 두 장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곳엔 오직 한 장소만 있을 뿐입니다.

1966년 페터 한트케가 줄거리도 사건도 없이 네 배우의 대사만으로 언어적 실험을 수행하는, 전통극 형식과는 전혀 다른 희곡을 발표하자 연극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이 작품은 가장 도발적인 문제작으로 꼽혔으며, 그는 문단의 이단아로 분류되었다.

연극은 제목처럼 배우가 관객을 ‘무시’하거나 ‘모독’하는 상황으로 진행된다. 배우는 관객을 향해 갑자기 욕말을 퍼붓기도 하고 물세례도 벌인다. 이러한 돌발적 행위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이 이 연극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 가을, 문득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이 떠오르는 것은 노벨상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관객과 ‘관객모독’의 작가가 바라보는 관객에 대한 온도차가 느껴져서이다.

가을 들어서 우리나라는 마을마다 도시마다 각가지 축제와 행사로 시끌벅적하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규모 큰 축제부터, 동아리 단위로 열고 있는 작고 소소한 행사들, 그리고 개인들이 주관하는 각종 예술 공연이나 전시회까지 합치면 하루에 10여 종류의 행사들이 같은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열려 관객들을 손짓한다. 이렇게 많은 행사들이 겹치다 보니, 요즘은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보다 자리를 지켜줄 관객들이 금값이다. 공들여 준비한 행사를 보아 줄 관객들이 필요한데 각자가 소속된 곳에서 행사에 참여하다보니 정작 관객은 없고 스텝이나 무대 위로 오르는 배우들만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행사 주최자들 사이에서 무대에 오를 사람보다 의자에 앉아있어 줄 관객 구하기가 더 어렵다는 자조 섞인 말이 돌 정도니까.

페터 한트케는 말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니라고. 위쪽 무대와 아래쪽 객석이 더 이상 두 세계로 나누어지지 않고 통일체를 이루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관계라고. 따라서 관객이 배우를 주시하는 것처럼 관객도 주시 받아야 한다고.

그렇다. 관객들이 변했다. 박수만 보내던 관객들은 이제 직접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모두 배우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한다.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신이 무대에 서고 싶은 이들은 ‘관객무시’ 아니라, ‘관객모시기’에 나서야 한다. 존재의 깨달음이야말로 성취감의 극대화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관객들도 행복감과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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