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1256년 신안 압해도에 몽고의 장수 차라대가 군선 70척을 끌고 나타났다. 고려의 궁성으로 올라오는 세곡선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항로는 통일 신라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고대 서남해안을 아우르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몽고가 해운 망의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깨뜨리기 위해 군선을 건조하여 파견한 것이다. 이곳을 막으면 고려의 조운 체계가 마비된다는 것을 파악한 후, 요혈에 침을 꽂듯, 어설프게 건조한 전선에 닻을 꽂고, 몽골 깃발을 나부끼며 출현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몽고군에 들어간 지 몇 해 만에 도망하여 돌아온, 고려의 낭장 윤춘(尹椿)은 전하기를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을 거느려 깃발을 늘어세우고 압해를 치는 데, 저와 한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드디어 수공(水攻)의 장비를 파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고『高麗史』는 전한다. 또한 같은 해 지랄타이의 군대를 신안 압해도 주민들이 투석기를 실은 전함으로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40년간을 이렇게 맞섰으나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원종은 몽고세력을 이용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무너뜨린 임연을 제거하고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원나라에 고개를 숙인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는 1271년 5월 15일 고려의 김방경과 몽골의 흔도와 홍다구가 진도를 공격하자 지도부를 제주도로 옮기지만 1273년 4월 28일 여원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1274년 5월 11일 태자가 원나라 16세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국이 되니, 국가의 주권은 실같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격이 강등되어 왕으로 불러야 했다. 왕들은 조(祖)나 종(宗) 대신 충(忠) 자를 넣어 원에게 대대로 충성하겠다는 굴욕적인 의미의 묘호를 붙이게 되니. 그 시작이 바로 충렬왕이다. 

고려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이 적극적으로 실시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제주도, 거제도, 강화도, 남해도를 제외한 모든 섬에 출입을 금한 것이다. 이를 어기면 국명으로 처단하였다. 이 정책은 1197년 고려 명종 때, 최충헌의 해민보호 목적의 봉해령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1275년 충렬왕은 이 봉해령을 활용하여 삼별초를 진압한 후, 섬으로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고 아예 말 사육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해상반란을 차단하고 몽고에게 군마와 종마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몽고 수군을 쫓아내는 압해도 해전 같은 기적은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최강의 해상국 고려가 바다에서 그림자를 거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1416년 조선 태종은 섬사람들이 세금을 잘 안 낸다며 섬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를 두고 일본은 섬 소유권을 포기한 ‘공도정책’이라며 울릉도를 그랬으니, 독도는 자연히 무주지였으므로, 무주지 영토편입조치를 취해 독도 영유권을 취득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대로 섬의 소유권을 포기한 ‘공도정책’이 아니라 해금정책(海禁政策)이었으며. 특히 왜구가 출몰하는 울릉도는 정기적으로 시찰하고 왜구가 발견되면 즉시 토벌하는 수토(搜討)정책을 폈다. 조선정부는 3년마다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한다. 돌아올 때는 울릉도 특산물인 황토와 향나무를 증거물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황토를 파내던 언덕이 황토구미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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