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동양일보]오후에 무심천변을 걸었다. 문암생태공원을 거쳐 까치내까지 10Km 정도를 걸었다. 걷다보니 무심천변의 풍경도 시골처럼 정겹다.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억새, 보송보송한 갈대, 그사이로 살랑이는 코스모스, 향기 짙게 소복소복 피어있는 들국화가 눈을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더욱 정겨운 것은 풀섶에서 들리는 풀벌레울음소리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숲속 벌레들의 협주곡이 한창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풀벌레의 대표주자인 귀뚜라미는 한쪽 윗 날개 뒷면에 일렬로 가지런히 돋아 있는 미세돌기들을 반대쪽 날개의 가장자리에 있는 마찰편으로 긁어 소리를 낸다. 귀뚜라미는 이를테면 첼로나 기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셈이다.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夢遊하는 밤/ 뒤뜰에 나와/ 의자에서 잠들었다./ 들리는 풀벌레 소리/ 귀뜰 귀뜰.... 또르륵.../ 찌륵 찌이르륵 뚝.../ 돌쯔 돌쯔....’ 귀뚜라미소리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합창단처럼 화음을 이룬다. 이렇게 무심천산책길에서 귀뚜라미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시골에서 자란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시절 시골에선 어디를 가나 가을이 되면 정겹게 울어대던 귀뚜라미울음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섬돌 밑이나 마루 밑에서 밤새도록 울어댔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길래 밤 새 우는지 잠 안 오는 날에는 그 소리 듣다가 새벽닭 울음소리에 억지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낮에도 들려오는 귀뚜라미소리를 듣고서 친구들과 풀섶으로 귀뚜라미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소리가 들려서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를 멎어 귀뚜라미를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귀뚜라미를 잡으려고 풀섶 이곳저곳을 뒤졌던 기억이 난다. 귀뚜라미를 넣을 집을 밀집으로 만들어 마루구석 음침한 곳에 놓아두기도 했다. 귀뚜라미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어서였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울지를 않는다. 저녁나절 몰래 방안에 숨어 있으면 울곤 하였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귀뚜라미의 모습도 잘 모른다. 풀숲에 갈 이유가 없고 다친다고 벌레 물린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듣는 소리가 컴퓨터자판 두드리는 소리, 휴대폰 벨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컴퓨터게임에서 나오는 별의별 소리 등 인공적이거나 가상적인 소리로 귀를 가득 채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듯하다. 너무 인스턴트식 감정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음(音)은 소리의 여운이며 마음(心)은 소리의 근본이니 소리는 곧 마음을 대표하는 그릇이라고 한다. 자연의 소리는 일단 마음이 편안하다. 자연의 소리는 지친 뇌를 쉬게 해준다. 솔바람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를 접하면 알파뇌파가 나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며, 무념무상의 경지로 이끌어 준다고 한다.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소리요법 연구가인 앨버트토머티스 박사는 5000Hz-8000Hz 사이의 소리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치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발생한 소리들이 속하는 음역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쾌함과 에너지를 전해주는 소리가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치열한 도시에서 삭막하고 틀에 박힌 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곤해진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은 무언가 허전하다. 이 가을에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봄이 어떨까. 산새소리, 풀벌레소리, 그리고 오색단풍, 거기다가 저 파아란 가을하늘의 새털구름 흘러가는 소리까지를...... 가을이 점점 깊어져만 간다. 파란 하늘은 더욱 깊어져 하늘이 호수인지 호수가 하늘인지 모르겠다. 파란 하늘에 퐁당 빠질 것 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얼마 후면 사라져갈 것을 아는지 풀벌레는 애처롭게 울어대고 시간은 흘러 단풍은 더욱 짙어 간다. 코끝을 스치는 찬바람은 아쉽게도 초겨울을 예감한다. 어쨌거나 가을밤에 들을 수 있는 이런 풀벌레 소리는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소리이자 저 세상을 맞이한 환희의 노랫소리일 수도 있다. 또 먹이사슬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소리이기도하다. 가을밤, 풀벌레 소리는 우리의 황폐한 마음을 정화해 준다. 자연의 자연스러운 소리 속에서 영혼의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느끼어 깊이 있는 생명의 진동과 기나긴 생명의 파장을 우리의 순수의식 속에 새겨넣어보자. 자연과 영혼이 하나로 합치되어 아름다운 빛깔의 소리를 내는 맑고 투명한 세상을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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