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찬비 찔끔거리더니 날씨 제법 쌀쌀합니다.

11월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처럼 어느 날은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스스로 토닥여주고 싶기도 하고, 어느 날은 그렇구나 하고 이해의 품이 넓어지기도 하는 달입니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시기라서 풍요로움보다는 쓸쓸함이 더 크게 묻어나기 때문인가 봅니다. 절정을 향해 치닫던 단풍의 화려한 색조도 점차 칙칙하게 바라져 낙엽으로 생을 마치는 때이며, 24절기 중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이 들어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지난 태풍에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나마 씨알이 굵어서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과수원 아낙의 얼굴에서 짠한 위로가 느껴집니다. 짧아진 해를 걱정하며 다시 연장을 잡는 촌부의 굽은 등에서 순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경쟁 사회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11월이 오면 꼭 함께 나누고 싶은 몇몇 생각이 있습니다.

11월은 ‘갈무리’의 달입니다. 마무리를 통해서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준비의 달입니다. 바쁘고 잘난 사람들이 놓치고 사는, ‘무엇을 거두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는 달입니다.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참된 지혜를 배우는 달입니다.



오늘이 마침 수능일이네요. 일 년, 혹은 몇 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준비해 온 결과를 단 몇 시간 만에, 시험이란 관문을 통해 확인받아야 하는 수험생과 그 부모들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수능 한파’란 날씨뿐만 아니라 매섭고 떨리는 시험의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말이겠지요. 해마다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의례로 겪어야 하는 이 땅의 수험생과 학부모님들께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교육정책이 ‘수능 한파’를 더 고착화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숙고하기에 앞서 현실적 요구에 밀린 정책적 배려가 이인삼각의 달리기처럼 뒤뚱거리는 모양새입니다.

이제 막 집권 5년의 반환점을 돌기 시작한 문재인정부가 2년 반 동안의 국정 운영 성적표를 받아들고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국민적 질책과 요구사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밤을 새워서라도 고민해야 합니다. ‘경제, 외교, 안보, 교육’ 전 분야에 걸쳐 제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에 진보와 보수, 여야가 따로 없이 머리를 맞대고 차분히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11월에 어울리는 말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있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유한한 존재로서 ‘겸손’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11월에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 중에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도 그 의미를 살펴보면 ‘메멘토 모리’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1621년 미국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서 식민지 개척자들과 토착 원주민들이 서로의 믿음과 협력으로 일궈낸 가을 추수에 감사하며 만찬을 즐긴 것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전자가, 언젠가 맞닥뜨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교만하지 말고 분수를 지키며 살라는 경구라면, 후자는 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생의 삶을 살아가라는 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분명 11월은 찾아올 것입니다. 11월을 지내는 마당에서, 인생 11월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왕성한 결실의 시기는 아닐지라도, ‘갈무리’ 또한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나이 듦’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생을 완성의 단계로 성숙시키는 소중한 시기로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미국 남서부 나바호족 인디언에게 전해오는 ‘메멘토 모리’가 그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의 어조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났을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땐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 ‘겸손과 감사’, 11월을 보내며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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