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아내는 신문을 읽을 줄 모릅니다/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도 못합니다/ 전화를 걸 줄도 모릅니다/ 컴퓨터는 더군다나 관심도 없습니다/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돈이 어디에 필요하겠습니까/ 은행이 무엇인지 모르니/ 은행에 갈 일도 없습니다/ 통장도 신용카드도 쓸 줄 모르니 버려야 합니다/ 버스카드도 필요가 없습니다/ 문명의 이기가 정말 이기이긴 한 것인가/ 요즘은 헷갈리기만 합니다/

이름을 몰라도 칼은 칼이고/ 사과는 사과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몰라도 아내는 자유인입니다/ 지는 해가 절름절름 넘어가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인의 시 ‘텅 빈 자유’전문이다.

시를 읽으면 가슴이 짠해진다. 대상이 마치 내 가족 같아서이다.

치매(癡呆)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며 치매 연작시를 쓰고 있는 홍 시인은 “치매(癡呆)는 치매(致梅)라 해야 한다며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했다. 치매 환자를 아름다운 매화꽃,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꽃으로 본 것이다. 역시 시인이 눈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영화에서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 대화를 기억한다. 손예진과 정우성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손예진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수진의 역으로 분했다. 수진이 사랑의 추억조차 지워지는 안타까움에 “나한테 잘해줄 필요 없어, 나 다 까먹을 거야.”라고 하자 철수(정우성)는 “걱정 마! 내가 대신 다 기억해줄게”라며 망각까지도 사랑으로 포용하겠다고 해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뇌의 사망신고서’로 불리우는 인지증 환자. 이 병은 유명인사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는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 영화 ‘십계’와 ‘벤허’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배우 찰톤 헤스턴, ‘형사콜롬보’의 피터 포크도 이 병에 무너졌다.

그런데 엊그제는 배우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는 우울한 소식이 들렸다.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윤 씨는 10년 전부터 이 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최근엔 딸의 얼굴도 못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다고 한다. 10년 전이라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에서 알츠하이머 환자 역할을 맡았을 때와 비슷한 시기다.

당시 윤정희 씨는 치매로 기억이 망가져 가는 ‘미자’역을 맡아 15년 만에 영화계에 복귀해 주목을 받았었다. 그 영화로 칸 영화제에 초청됐고, ‘올해의 여성영화인상’도 받았다. 그런데 영화 출연 당시 이미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니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로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진다.

윤정희 씨. 그가 누구인가. 한국 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19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며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배우가 아닌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백건우 피아니스트와 만나 결혼하면서 미련없이 은막을 떠난 그리움의 배우다. 그런 그가 치매로 무너지고 있다니. 도대체 이 병이 무어란 말인가.

나이가 들면서 가장 큰 두려움은 나도 치매라는 덫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모든 일상생활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무서운 병.

중앙치매센터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70만 5473명으로 추정되며 치매 유병률은 10%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화가 계속되면서 치매 환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2024년에는 100만명, 2039년에는 200만명, 2050년에는 3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노인성 치매도 심각해서 85세 이상 인구에서는 절반 가량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치매환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정작 내 어머니를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92세 노모는 아직도 살림을 놓으려 하지 않고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리고, 신문을 읽고, 한자를 쓰며, 공원을 걷고, 스스로 병원을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냄비를 태우거나 물건을 찾는 일이 잦아져서 뇌사진을 찍고 검사를 했더니 해마가 작아졌다며 노인성 치매의 경계이자 초기단계라는 진단이 나왔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충격으로 아득했다. 이제 그 멀고 힘든 여행을 시작해야할 노모가 불쌍했다. 생각 끝에 적절한 취미생활을 위해 그림 그리기 책을 선물했더니 요즘 노모는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 지낸다. 햇살 따뜻한 거실에서 꽃을 그리고 초록색 잎을 칠하면서 늘어나는 실력에 스스로 즐거워한다. 아직은 괜찮다고 느끼는 지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드릴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이다. 매화로 가는 길, 그 길의 동행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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