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2. 재일조선인 학생의 동화교육 체험



●싸움의 구조

일본 아이들이 ‘조센징’, ‘조선인’이라는 말을 비난의 용어로 상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성인이 된 재일조선인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볼 경우, 대개 일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싸움을 한 체험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록 거기에서부터 ‘작은 민족의식’(張斗植)이 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행한 출발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 출발에서 최초로 ‘악의 표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일본의 일반 서민 아이들이었다. 재일조선인은 이들 서민의 거주지 안에서 생활 할 수밖에 없고, 같은 지역이나 학교에서 놀고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아이와 놀지 말도록 설교하는 일본인 부모도, 또한 일본의 민중임에 분명하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있어 이들 일본 아이들은 차별 사회의 대표자였다.

다이쇼(大正) 말에 일본으로 건너온 장두식 소년은 일본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알게 되자 놀이터에서 일본 아이들과 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싸울 때에는 반드시 일본 아이들이 ‘이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경멸의 눈빛으로 소리를 질러댔고, 거기에서부터” “나는 나 나름대로 작은 민족의식을 깨닫고 그들을 ‘쪽발이 자식!’이라며 반항심을 불태웠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의식을 막 갖게 될 즈음, 두부장수집 악동이 매일 밤 일부러 그의 집 앞까지 와서 “헤이, 조센진”이라고 불러댔기 때문에 참다못해 장두식은 그와 대판 싸움을 벌였다.

괴롭힘을 당하고 싸움질을 하며 조선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작은 민족의식’은 상황이나 개성에 따라 반항을 하든가 숨어서 도망치든가 두 가지 형태를 취하였다.

증언은 전쟁 이후로 건너뛰게 되는데, 쇼와(昭和) 2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윤융도(尹隆道)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우선 조선인임을 실감하는 것은 대체로 소학교에 다닐 때 …주위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너는 조센진이다’라든가, ‘조센진은 불쌍하다’라든가 하고 놀리며 노래를 하든가 혹은 작은 돌을 던지기도 하면서 내가 조선인임을 알게 됩니다. … 그렇게 되면 사는 방법은 크게 나누어, 대단히 반항적인 인간이 되든가 아니면 오히려 풀이 죽어 자신을 그처럼 업신여기는 학생들, 차별하는 학생들에 영합하여 무기력해지든가, 그 두 가지 외에는 방도가 없지요”



어떤 방식을 취하든 윤융도가 얘기하듯이 “우리 내부에는 틈만 나면 앙갚음을 해 주겠다는 적대감이 항상 잠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만큼 사람에게 사정없이 상처를 입히는 세계는 없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은 끊임없이 긴장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다.

두 가지 생활 형태 중에 김희로는 후자의 생활을 취하였다. 김희로보다 나이 많은 친구인 김양순(金良順)은 김희로의 소년 시절을 회고하며,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게 되고, 자연히 스스로 자신이 비뚤어진 것을 깨닫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게 된 어린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희로는 1928년 기요미즈 시에서 태어나 그 곳의 소학교를 중퇴했는데, 얼마나 귀롭힘을 당했던지 ‘학교에 가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라는 곳이 대단히 무거운 짐이 되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실제로 학교에서 끊임없이 조센진이라며 상급생이나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항상 우울한 기분이었다. 학교가 나에게 준 것이라고는 비굴함과 왜곡된 마음뿐인 듯하다. 학교에서의 이렇다할 즐거운 추억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해서 소학교 3학년 경부터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조선인이란 뭘까?’라든가 ‘왜 우리는 이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 아이들의 괴롭힘에 굴하지 않는 방법은 싸워서 힘으로 눌러 이기는 것뿐이었다.

소학생 시절의 김달수는 키도 크고 힘도 세서 골목대장이 되어 “조센진이라고 놀리는 놈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짓누르고 있던 비굴함 때문에 묘하게 비뚤어지게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도 생각하지만, 밖에서 볼 때에는 변함없이 난폭한 아이였다” 그 때문에 학교의 “도덕 점수가 나빴다”고 회상한다. 윤융도는 전후세대에 속하지만 같은 체험을 털어 놓는다.



“나 자신도 소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 때까지, 항상 학교에서 소위 왕초였다. 결국 힘을 가짐으로써만, 일본에서는 대등한 인간으로 혹은 오히려 나를 차별하는 인간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나는 어쨌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고, 싸움꾼 도사였다”



이들의 항의 행동은 일본 사회에서 난폭‧비행으로 간주되고 교사의 눈에는 최하의 도덕 점수에 해당하는 행위로 비춰져, “조선인이란 도대체가 말이지…”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반발 감을 샀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는 싸워서 완력으로 이를 이겨나가는 것이 스스로의 인간성과 민족의 존엄성과 그 복권을 상대 일본 아이들에게, 나아가 어른들에게 요구하는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요소가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해할 만한 태도나 능력은 일본 사회와 교육에서 결핍되어 있었다.



●점심시간 풍경

김희로는 “조선인이라고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싫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틀림없이 조선인이니 말이다”라고 느끼는 그러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조선인임을 싫어하는 자기 부정의 조짐은 싸움의 심리적 구조로서 발생하는 ‘작은 민족의식’의 이면에 몰래 숨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의 이미지를 갖지 못한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경향이었다.

그러한 김희로도 “조선 음식은 대단히 좋아했다” 이는 김희로만이 아니라, 조선식 식생활을 계승하여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이들은 민족적 생활의 체질을 흡수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학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조선을 전수해 나가는 것을 짓밟는 좋은 기회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였다.

전쟁 전(태평양전쟁)에는 급식제도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고 등교했다. 그런데 일본 아이들은 이 도시락을 통하여, 식생활이란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배우기보다는 차별의 재료로 삼는 법을 익혔다. 그것은 어른들의 차별의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소수파인 재일조선인 학생들은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소화(昭和) 초기에 이미 나타났다. 요코스카(橫須賀) 시에 살고 있던 정두식은 학교에 도시락을 갖고 갔다가 혼이 난 일을 회상한다.



내 옆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던 오카자키라는 아이가 갑자기 정적을 깨뜨리며 “으아악! 지독한 냄새!”라고 외치고 코를 킁킁거리면서 내 도시락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엑! 이게 무슨 냄새야!”라며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더니 코를 움켜쥐고는 비어 있는 다른 자리로 옮겼다.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며, “으~ 마늘 냄새야!”하며 속닥거렸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절대로 학교에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1935년대에 고베에서 소학생이었던 오임준(吳林俊)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나에게는 학교 점심시간도 정말 재미없었다. 즐거워야 할 그 단란한 한 때는 오히려 내 몸이 겨자씨처럼 작게 오그라드는 것 같은 탄식의 시간이 되어 버린다. 조선 음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난 요리는 아니고, 그저 때때로 어머니가 도시락 반찬으로 싸준 김치 때문이었다. 도시락 통을 쩔렁거리며 모두가 식사를 하려고 할 때에 마늘과 고춧가루의 독특한 냄새가 온 교실로 퍼져나간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합창이 터져 나온다. “뭐야 이거 마늘 냄새 아냐, 지독해” “으아악!, 구린내 구린내다! 밥이 목으로 안 넘어가” “조센진 자식!” “마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때는 엄마가 미워지고, 계란 후라이까진 아니어도 하다못해 냄새 안 나는 반찬을 싸주면 좋을 텐데… 하며 원망을 하였다.



일본 사회에서는 김치가 식생활에서 마이너스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나아가 조선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일본인 학생에 의한 김치 배척은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조선인의 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된다.

바꾸어 말해 습속이나 미각의 차이를 가치의 서열로 살짝 바꿔치기하여 차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에서는 도시락 반찬조차도 당사자들에게 ‘거짓된 자기’(高 史明)를 규정하는 계기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는 아이들을 직접 매개체로 삼아 조선인으로서의 생활에 등을 돌리도록 일본 사회가 차별적 압력을 가한 예이다.

김치와 ‘거짓된 자아’의 형성 문제와 관련하여 1932년 시모노세키 시에서 나고 자란 고사명은 체험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것(김치)은 조선 가정에서 자란 조선 아이들에게는 아주 맛있고 좋은 것이라고 하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학교에 가지고 가면, 매우 경멸받는 냄새는 것이라는 그야말로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상황이 존재한다.

그 때 아이들이 살아남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선인 아이라 해도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역시 학교와 그 사회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그라고 말하기보다 나 자신이다)속으로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좋은 것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수 가 없다. 그 경우, 조선인 사회라는 것이 분명히 성립되어 있다든가 가정이 완전히 제 모양을 갖춘 강고한 배경을 갖지 못한 아이들은 그 사회의 가치관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이러한 ‘강고한 배경’을 갖기 어려운 많은 재일조선인 학생은 식생활이라는 기본적인 것까지도 차별과 동화의 경로에 포함되어 버림으로, ‘거짓된 자아’를 형성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외견(外見)적인 것과 내시(內示)인 것과의 가치관 분열이라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곡의 골은 더욱 깊다. 고사명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맞춰지지 않는 것이 남는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이것은 마늘이기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왜곡시켜 간다. 그 경우에 자아라는 조선인은 왜곡되어 간다.

즉 조선인으로서의 남아 있는 부분까지도 변질되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생활에서 민족적 전통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과 동화의 회로 속에 짜 넣었다. 김치와 더불어 한복도 거기에 포함되는 전형이었다.

“교문을 들어선 조선인 학생들의 흰옷은 일본 소년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뭐야, 조센진 아냐? 그리고, 그들은 쾌감에 젖어드는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김치와 흰옷은 모두 어머니와 가정생활을 상징한 것이었다.

이 같은 민족의 생활 전통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촉진 작용이 학교에서도 강력하게 이루어져,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조선인임을 혐오하게 만들고, 사상이나 지식만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의 일본화까지 수행하는 용수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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