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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공산화를 막은 죽산의 토지개혁
풍향계/ 공산화를 막은 죽산의 토지개혁
  • 동양일보
  • 승인 2019.11.1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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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죽산 조봉암은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에 의하여 간첩죄 등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로써 이승만 정부의 사법살인의 희생자였던 조봉암은 사형 후, 52년 만에 복권되었다.

사형이 집행되자 구명운동을 했던 장택상은 “법은 법이라. 뭐라 자신은 판단하기 어려우나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라고 하였고, 윤치영도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조봉암의 사법살인이 벌어지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이고, 차기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전략을 진행하던 차에, 이듬해 4·19 혁명이 터지자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

조봉암은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병행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독방 생활을 한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할 때, 그가 독립운동을 접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에게 헌금했다는 설이 퍼진 것도 이때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원의 주시를 받게 되지만 1945년 1월 다시 체포되면서 그런 의혹은 수면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은 후, 석방과 동시에 인천에서 조선공산당, 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헌영과 번번이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변신의 귀재였다. 1946년 5월 사상전향을 한 뒤,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한 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운동 즉 중도파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중단한 ‘유휴분자’와 사상을 전환한 배신자로 공격받고 있었고, 김규식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대면조차 하지 않았다. 협상테이블에 앉을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협상 타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한의 선거 가능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하자며 좌우합작, 남북협상파에서 5.10 총선에 참여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즉시 좌익의 민족자주연맹의 중앙과 지방조직에서 강제 출당 조치당하였다.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에 참여 주장 이후, 선거기간 내내 테러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의 구성에 있어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림부장관으로 좌익과 우익을 아우를 수 있는 조봉암 카드를 빼 들었다. 이때 죽산은 농지개혁을 조건으로 입각하게 된다.

1948년 9월 4일 조봉암은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2개월간의 실태조사를 통해 개혁안을 만든 후, 각도의 순회 공청회를 통해 각종 의견을 수렴하였다. 드디어 1949년 1월 24일 농지개혁 농림부안이 국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토지개혁 최종안으로 5년 평균 작물 생산량의 15할을 지주에게 보상해 주고, 농민에게는 5년 평균 생산량의 15할을 3년~10년 상환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북한은 국가에서 토지를 몰수했으나 남한 유상 매입과 유상분배가 염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소작농은 평소의 지세를 몇 년 내면 내 땅이 되는 것이다. 농민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조봉암의 인기가 폭발하였다. 대통령에 출마하여 30%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 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남한은 그의 토지개혁으로 70%의 농민이 희망을 손에 움켜쥐고 공산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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