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홍 청주교육지원청 행복교육센터 주무관

서기홍 청주교육지원청 행복교육센터 주무관

[동양일보]과거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지위와 그에 걸맞게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많아지는 존재이다.

태어나서는 누군가의 자녀로서의 지위에 따른 역할만 수행하면 되지만, 성장을 거듭할 때마다 학생, 부모, 조직의 구성원 등 많은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자유의지로 획득한 지위도 있고, 생존이나 사회규범의 준수 등을 위해 불가피하게 맡아야 하는 지위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맡은 바 지위에 따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통상적인 사람의 도리이다.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주요 사상에 ‘정명(正名)’이라는 것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등장한 개념으로써 명분·이름을 바로잡자는 주장인데, 정치·윤리 등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된 사상이지만 ‘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덕을 실현하면 세상이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사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논어>의 한 구절이 그 뜻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작건 크건 사회의 불안요소와 문제들은 ‘정명’이 실천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 ○○답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자기의 이름(名)에 해당하는 덕을 실천하지 못함이며 충실한 역할 수행의 실패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 이름에 상응하는 덕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임을 감안했을 때, 명확하게 단정할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지금은 ‘망각’과 ‘과부하’라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매순간 숱한 망각의 결과들을 생산해낸다. 이는 역할수행이라는 부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자식으로서의, 부모로서의, 배우자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행태는 심히 충격적이며 공무원으로서, 스승으로서 실천해야 할 덕을 망각한 사례들은 얼마 전까지 인터넷과 지면을 뒤덮었다. 인간을 끊임없이 어지럽히는 각종 정념들로 인한 ‘정명’의 망각이다.

또한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개개인은 단순하지 않은 여러 가지의 지위와 역할에 엮여있다. 아들이자 사위, 남편이고, 조직의 상사이면서 부하직원이며, 얽히고설킨 수많은 인간관계의 한 조각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끝없이 고민하며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다보니 종종 부하가 걸린다.

자신의 많은 역할, 이름(名)속에서 조화로움을 잃고 극단적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아예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특정 역할수행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부정을 저지르거나, 모든 역할수행을 포기하고 사회, 생(生)과 단절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결국 ‘망각’과 ‘과부하’로 인해 올바른 역할수행 즉, ‘정명’을 실천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곧 ‘비명(非名)’이다. ‘비명’을 경계해야 한다.

완벽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의 이름(名)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고, 가끔 일탈이 있을지라도 금방 다시 돌아와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어지러운 지금의 사회에서 우리는 ‘정명’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