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 황 논설위원 / 시인

나 기 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시간여행을 다녀왔다. 필자가 속해 있는 단체의 하반기 문화탐사 겸 ‘문화사랑-우리랑’이란 소그룹 활동의 금년 마무리 행사인 셈이다. ‘이융조 교수와 함께 떠나는-남한강유역 선사문화 탐방’이라는 거창한 플래카드를 달고서다. 이번이 열 번째 행사인지라 그동안 공감대를 나눴던 지인들이 참여해 처음 우려와는 달리 꽉 채운 대형버스 한 대로 출발했다.

무엇보다 이번 행사가 단박에 수준 높은 문화탐사로 격이 높아진 데는 80세 노교수의 동행이 주효했다. 바로 1983년 수양개선사유적을 발굴할 당시 충북대학교박물관 조사팀의 조사단장을 맡았던 이융조 교수가 평균나이 줄잡아 60세쯤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잇는 시간여행을 이끌며 생생한 육성으로 역사성을 부여해 줬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란 말 그대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유물과 유적이라는 사료(史料)로부터 얻어진 이야기를 촘촘한 학계의 그물망으로 걸러 시간의 숙성과정을 거쳐 기록의 역사로 재편되는 것이다.

사적 제398호,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수양개 유적만 해도 1983년부터 충주댐 수몰 지구 내 문화유적 조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두터운 시간의 먼지 속에 묻혀 잠들고 있던 집터였고, 돌멩이였으며 토기 조각이었다. 10여 차례의 조사 끝에

50여 곳의 석기제작소, 26채의 집터, 2개의 문화층, 불탄 자리. 좀돌날, 슴베찌르개, 주먹도끼 등등 발굴되고, 출토되면서 단양 수양개 유적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지금은 후기 구석기시대 선사인(人)의 숨결과 석기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긴 역사의 시간 속에서 걸어 나와 2만 년 전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석기문화의 확산과 전파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시간’이란 주제는 이번 여행 내내 따라다니던 화두다.

석기와 토기와 뼛조각을 찾아내고, 확인하고, 발표하고, 고증을 거쳐 인정을 받는 고고학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답이 될까.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역사로부터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어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교과서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30만 년 전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확신은 유물과 유적이 해주는 말을 귀담아들을 때 가능하다. 모든 유물에는 생명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의 흔적이 시간의 길을 따라 현재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년, 몇 개월에 걸쳐 땅속을 뒤져 만나는 선사인과의 대화가 역사를 만들어내고 기록되는 것이다. R.G.콜링우드, 영국의 역사학자가 말한다.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다.’라고.

100세 인생이라지만 수백만 겹을 기워 입어야 다다를 수 있는 영원한 시간에 대한 본능적 회귀와 원초적 두려움이 섞인 이 묘한 감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유한한 존재로서 영원한 시간에 대해 갖게 되는 경외심인가.

몇 만 년 전, 불탄 자리의 흔적이 각자의 머릿속에서 복원되고, 원시를 살았던 그네들의 생존을 위한 조우의 과정들이 하나하나 새겨진다.

‘바게트 (Baguette)’처럼 길쭉한 돌에 새겨진 눈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아(象牙)가 분명해 보이는 뼈의 조각이 과연 한반도에서 코끼리들이 떼 지어 살면서 저녁노을 강가에까지 내려와 새끼 코끼리 등에 물을 뿌려주는 이야기를 백 퍼센트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인생은 한 찰나이다. 죽음도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의 극작가 실러의 말이다.

‘시간은 우리가 나누어놓은 것일 뿐이다. 과거와 현재도 모두 임의로 정한 것이다.’라는 말은

역사 안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감동이 고조됐던 청주소로리볍씨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빠듯한 일정으로 치러 진, 긴 시간여행의 여운이 나른한 행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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