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들어 미군에 대하여 대대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탄압이 점점 숨통을 조여오자, 10월에 계획된 파업을 9월로 당겨서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946년 9월 좌익계열이 주도한 총파업이었다.

1946년 9월 23일 파업이 시작되었다. 전국의 4만여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남한 철도를 마비시켜 버렸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9월 24일, 식량 배급, 임금 인상, 좌익 탄압 중지 등의 12개 요구사항을 담은 총파업 선언서를 내걸자, 서울 지역의 공장 295개, 노동자 3만여 명, 사무원 6천여 명, 20개 학교, 학생 1만 6천여 명, 교수 3백여 명이 참여하였다. 9월 25일에는 경성출판노동조합, 28일에는 중앙전신전화국, 10월 1일에는 우체국과 경성전기주식회사, 10월 3일에는 부산전신국 등이 대대적으로 파업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은 조직적인 민중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킬 기회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왕좌왕하다가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국민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폭력적 진압이 정당화되는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있었으나 좌파지도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대신 노동자들만 우익세력의 탄압을 처참하게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였다.

이 파업은 10월 1일 대구 사건으로 불을 옮겨 붙이고 말았다. 노동단체들이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하였다. 북한으로 피신하였다가 소련을 방문하고 서울에 나타난 박헌영은 서울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축전을 낭독하였다. 그의 축전은 타지역 행사장에서도 미군정에 대한 항거의 내용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대구부청 앞에서 시위하던 황말용, 김종태라는 노동자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순식간에 시위 참가자와 경찰 간의 폭력사태가 진행되었다. 박헌영은 불필요하게 미군정을 자극하지 말라며 폭력시위 중단을 촉구했으나 분노한 민중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었다. 박헌영은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 버렸다.

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대구경찰서로 몰려갔다. 서장은 총을 내려놓고 유치장 열쇠를 그들에게 내주었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이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계받으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엄숙한 경찰권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군중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경찰이 시위대에게 총을 난사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사망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행동을 전환해버렸다. 곳곳에서 경찰관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순식간에 역사를 피로 적실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다.

이 시위에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여 과격한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작 주체자인 조선공산당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 시위를 추단하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실패, 즉 배고픔이 원인이었으니 이 시위는 민심을 타고 불같이 번져나간 것이다. 시위대는 친일파 청산과 민중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미군과 국방경기대가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 반공주의 우파가 나섰다. 이때 좌파가 무수한 테러를 당한 가운데.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발생하였다. 재산 피해까지 잇달았다. 앞장섰던 공산당은 불 지르며 사라지고 뒤따르던 시민 노동자만 불에 타죽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당시 박헌영은 대구 사건을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하였으나, 좌익 9개 정당 대표들은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비난했다. 2010년 3월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는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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