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창동양포럼 주간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7월 27일 토요일

한 사람이 탄생한다는 것은 우주생명이 특정개인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태어난다는 것 (birth)-이고, 죽는다는 것은 다시 우주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귀환, 귀향(return)-이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사이를 한 삶, 일생, 생애 (Life)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거기서 와서 거기로 돌아가는 본디, 근원, 본원을 노자는 '도(道)'라 했고 장자는 '원기(元氣)' 라 했고 최재우는 '하늘님(天主)'이라고 하고 '지기(至氣)'라고도 했으며 기독교에서 '하나님(오직 한분이신 절대신)' 이라고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불려왔으나 각각의 속뜻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처럼 인격적 존재로 파악하는 경우와 노자나 장자처럼 비인격적 작동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요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마침내 죽어서 이세상을 떠나게되는 이치를 요약해서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유사점이 있다.

이것을 다시 애초의 생명언어로 정리하면 우주생명이 어느 한사람의 몸을 빌려 이세상에 태어나서 일정기간 개체생명으로 차원전환 한것이며 마침내 죽어서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사망, 사멸, 사거로 보는 관점과 귀천, 귀원, 귀환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본디로 돌아가서 어떤 형태가 될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모든 것이 끝나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본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서로 다른 점이다. 나는 죽음=새로운 시작이라는 관점을 견지해왔다.



7월 28일 일요일

나는 자신이 그 동안 나라안팎에서 펼쳐온 '공공(公共)'하는 철학 대화운동의 입장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기간 살다가 마침내 죽어가는 점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 라는 생사관(生死觀)을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주로 나 홀로의 문제로 생각하는 입장인데 그것은 '사(私)'적인 생사관이다.

둘째 유형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가를 위한 출생과 생명과 사망으로 뜻매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公)적인 생사관이다. 한때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서 죽는 것을 산화(散華=꽃잎처럼 아름답게 사라져간다)라고 미화한 적도 있었다.

셋째 유형은 사람과 사람사이-개인간, 가족간, 남녀간, 공동체 구성원간, 세계시민간-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다. 그것을 나는 '공공(公共)'적인 생사관이라고 정의해왔다.

근대화의 역사는 국민국가형성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를 위해서 태어나고 국가를 위해서 살다가 국가를 위해서 죽은 것을 찬양, 고무, 숭상하는 생사관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성숙하면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의미와 가치를 중심으로 인간의 탄생과 생명과 사망을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공적도 아니고 사적도 아닌 공공(公共)적 생사관의 수립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것의 간략하고도 의미가 분명한 표현을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틴어표현으로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다 (Inter hominesesse)' 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음을 끝낸다(Inter hominesdesinere)'로 각각 표현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 자신의 라틴어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사람이 태어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나타난다(Inter hominesapparere)' 라고 하면 출생과 생명과 사망을 아우르는 공공(公共)적 생사관의 라틴어적 표현의 구색이 맞추어진다.



7월 29일 월요일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경험철학의 시조)이 했다는 말을 되새겨본다. "오래 될수록 가장 좋은 것이 네가지가 있다. 오래된 장작은 가장 잘 타고, 오래 숙성시킨 포도주는 마시기에 가장 좋고, 오래 사귀어 온 친구는 가장 믿을만하고, 오래산 작가가 쓴 책이 읽기에 가장 편하다"

나는 85년이나 살았으니 잘타는 장작이나, 고아(高雅)한 풍미의 포도주나, 삼익우(三益友)같은 친구나, 노련한 작가의 명작과 같은 삶의 진미(珍味)를 만끽 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나자신의 오랜 삶이 누구에게 그 중의 하나라도 제공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스카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영국의 극작가, 소설가)는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젊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라고 잘 알려진 장편소설 ‘도리언그레이의 초상화(The Picture of Dorian Gray)’에서 말하고 있다.

나의 젊은 시절은 너무 어렵고 어두운 시대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한 좋은 일도 없었고 그저 일상적 생활이 힘들고 버거웠다. 그 젊은 한때는 세상이 빛났고 삶이 행복했었는데 이제 나이들어보니 세상이 빛을 잃고 삶이 불행하다는 비교감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여러측면에서 심사숙고해 보아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젊은 시절보다는 노년의 몸과 마음과 얼이 그런대로 집착에서 초연할수 있는 지금이 좋다. 와일드가 천재적인 문필력을진 지니고 있었지만 80년이 넘도록 인생을 살아보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직접 살아보아야 이 맛을 알 수 있다.



7월 30일 화요일

시(詩)와 대화는 노년기를 살아가는 나의 절친한 친구다. 세대간, 남녀간, 지역간, 전문영역간 대화를 펼쳐 오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눌때 사람과 사람이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무엇인가 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공유하게되는 관계-독일어만이 갖는 특이한 표현으로 ‘Mitmenschlichkeit’-가 형성되기도 하고 왠지 서로 어긋나고 부딪힌다는 느낌을 공분(共分)하게 되는 관계-독일어로 ‘Gegenmenschlichkeit’-가 조성되기도 한다.

공감촉진적 인간관계와 대립강화적 인간관계라고도 말할수있을 것이다. 너무 자기방어적으로 상대를 설득시키려는데만 주력하다보면 때로는 공연한 논쟁-원효가 말하는 '화쟁(和諍)'의 정반대-만 불러일으키게 되어 공감형성이 어렵게된다.

법률이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오늘의 동양포럼처럼 시를 통해서 다양한 역경에 처해서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시를 함께읽으면서 정신신체상관적 치유효과를 높여보자는 뜻으로 모인자리에서 시가 가진 탁월한 정감성이 주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노숙년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 사람으로써 시에 기대하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보다는 상관연동적 공감성이 아닐까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심신이 곤핍하고 영혼이 외로울때 아름다운 시 한수가 얼마나 풍요한 감동과 감격과 감사의 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가?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그립다.



7월 31일 수요일

내가 최근에 만난 시인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시를 쓰신 분은 80대의 평범한 주부시인 이월순씨다. 동양포럼의 유성종 운영위원장소개로 알게된 이 분은 교회목사님의 사모님이시고 한 수필가의 어머님이시기도하다. 이 분의 많은 시들 중에서 특히 '미련없이가리라'라는 시가 잔잔하면서도 짙은 감동의 파동을 일으킨다.

미련없이 가리라.

주님 가만히 손 내밀면난 그 손에 내손얹어살며시 미소지으며 일어서리

이제 그만 가자하시면뒤돌아보지않고 따라가리내 사모하는 아름다운 그나라

보고팠던 엄마도 계시고그리웠던 동생도 있는데 나 얼싸 일어서 주님 손잡고 가리

고난 많고 굴곡 많은 세상사조금도 미련없어요.툭툭 다 털어버리고 가리라.내 늘 소망하던 저 좋은 하늘나라

이월순 신앙시집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 (청주: 대한출판 2016) p. 95



8월 1일 목요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강단시인들의 시론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은 생활시인들의 삶에서 빚어진 체험-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보람있었던-의 응어리 알갱이들이 수식없이 영롱하게 녹아 스며있는 시에 접하게 될때 시인의 시혼(詩魂)과 나의 생혼(生魂)이 서로 울려서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시란 내게 있어서 과연 무엇일까? 진지한 물음 앞에서 진솔한 응답을 찾는 나에게 평범한 주부 이월순시인이 64세 되던 해-아마도 정식절차를 밟아 시인으로 공인 받고나서-썼던 '시'라는 시가 내게는 어느 유명한 전문가 시인들의 시론들보다 나이듦에서 오는 정겨움을 공감하게 해준다. 난삽한 전문 철학자들보다도 일상에서 철학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친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처럼.





시는 나의 대변자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빠져 있을 때 시는 어머니처럼 다가와 나를 일으켜 달래 주었습니다.

시는 베개 위로 흐르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속박 감에 자유를 부르짖을 때 시는 해방으로 다가와 나를 탈출 시켜 주었습니다.

이유 없는 호통 속에 나는 기죽어 여자임을 한탄하고 울고 있을 때

시는 나에게 다가와 이런 때는 시를 써서 네 설음을 토해 내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월순 '내 손톱에 봉숭아물' 64세의 한 여인이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쓴 이야기 시집 (서울: 삶과 꿈) P. 129



8월 2일 금요일

며칠째, 아니 몇밤째, 옆구리가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약국에서 근육통의 일종이라고해서 한방파스를 부치고 기다려 보았지만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 나이듦에 따라 전에 없었던 아픔의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각오하고 있지만 그래도 옆구리가 아파서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는 아픔은 처음 겪는 일이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새벽 1시반에 통증이 아주 심해져서 누워있기가 어려워 일어나서 파스를 갈아부치고 손끝에 힘을 모아 눌러보기도 하고 열심히 안마도 해보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픔은 나의 모든 경감을 위한 시도를 소용없는 꼼수라고 꾸짖으면서 그저 조용히 참아 내라고 훈계하는것같다. 그리고 정확한 원인도 모르면서 무식한 고집으로 제멋대로 처방을 내리고 통증을 학화 시키지 말고 병원에 가서 겸손하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간다고 해도 옆구리가 아플때는 내과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외과에 가야하는지 아니 그보다 앞서 어디에서 누구에게 가서 이런경우에 어느병원에 가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되는가?

아픔이 심해진다. 견디기가 몹시 힘들다. 똑바로 앉아 눈을 감고 아픔의 진행상황을 지켜본다. 몹시 아팠다가 조금 덜해졌다가 또다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온다. 같은 자세를 계속 할수없게된다. 그래서 앉아있다가 걸어보기도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픔은 아주 심해졌다가 조금 덜해졌다 끝도없이 반복된다. 다행히도 가족들이 모두 평안하게 자고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고통때문에 잠못이루는 사람들-특히 노년남녀들-이 많이 있을 거야. 눈으로 볼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수있는 고통의 공동체-아픔을 함께하는 자들의 동시적 연대-의식같은 것이 있어서 혼자서 견디어 낼 수 밖에 없는 고독속에서도 결코 처절하게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라는 실존적 진실을 실감한다.

이 실감이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고 아픔을 견디면서 새 아침을 기다린다. 아픔의 암흑이 진할수록 아픔이 완화되는 새벽노을이 그립다. 아니다. 더이상 안아픈 새 아침이 열릴 것이다. 아니다. 더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 새아침을 열어야 한다. 오전 3시, 아직도 밖은 칠흙같이 깜깜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격통이 진정되는 밝은 동이 트일것이다. 동이트면 새날의 기쁨이 아픔을 이겨내는 새삶이 시작된다.



8월 3일 토요일

기왕에 옆구리아픔이라는 손님이 찾아왔으니 똑바로 마주해서 제대로 앓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현재시간은 새벽 1시 40분. 어제에 이어서 나흘째. 우선 아픔에도 몇가지 종류가 있고 번갈아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면서 각각의 존재와 특징을 알려준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쑤시는 아픔-疼痛–을 견디다보면 어느새 무지근한 아픔-鈍痛–으로 바뀌고 다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아픔-極痛–으로 바뀐다. 그리고 아주 잠시동안 아픔이 아픔을 진정시키는 듯한 무통–아니 통증이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듯한–의 순간이 다가온다.

그래서 짧은 잠을 자게 되지만 이내 뼈속까지 침투하는 격통때문에 길고긴 불면의 시간을 견딜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픔은 잔인한 손님이다. 이쪽의 성의나 호의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래서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85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아픔을 여러번 겪었고 이제 다시금 전에 겪었던 것과는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아파야 하는 걸까? 라고.

그러는 동안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길고긴 심통(深痛)과 짧고 짧은 무통(無痛)의 반복순환을 감내하는 가운데서 마침내 체득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명제로 압축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나는 지금 살아있다. 고로 나는 지금 아프다 (Vivo ergo doleo = Now I live, therefore now I pain.)” 아니다. 더 절실하게 깨달은 바를 직설하면 이렇게 명제화 하는 것이 정직할 것 같다. “지금 나는 아프다, 고로 지금 나는 살아있다. (Nunc doleo, ergo vivo = Now I pain, therefore I live.)” 그렇다. 만약 지금 내가 죽었다 (= 죽어있다)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몸이 아플때 살아있음을 분명하게 직감한다.

‘사람’이란 ‘삶의 뜻을 아는 존재.’ ‘알다’는 ‘앓다’와 그리고 ‘앓다’는 ‘아프다’와 속뜻이 서로 통하는 한글말들이다. 결국 인간은 자각하거나 무자각이거나 아픔을 견디는 존재(homo patiens)이며 그래서 서로 아픔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존재 (homo curans)이다. 아니다. 그냥 존재나 실존이 아니라 각존(覺存=아픔을 깨닫는 존재)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