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검찰청 전화번호 사기범에 연결
금융위원회 공문 등 보이며 안심시켜
“사건 수사 협조” 명목 현금 등 요구

지난달 26일 발생한 보이스피싱 사건 피해자가 받은 금융위원회 위원장 관인이 들어간 허위공문. 담당관, 사무관 등 이름을 비롯해 근거법률 등이 나열돼 있고, 서명도 있다.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지난달 26일 오전 9시 30분께 청주에 사는 주부 김영숙(가명)씨는 자신을 검찰청 A수사관이라고 소개하는 한 남성의 전화를 받았다. 이 수사관은 “금융사기 사건을 수사 중으로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보이스피싱으로 김씨는 은행에 있던 피같은 돈 5000만원을 뜯겼다. 말로만 듣던 보이스피싱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 몰랐던 김씨는 검찰과 금융위원회를 사칭한 사기범들의 교묘한 수법에 돈을 건넬 때까지 한 점 의심도 하지 못했다.

전화를 건 A수사관은 “사기 사건으로 김씨가 고발돼 현재 용의자로 수사하고 있다”며 윽박질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를 통해 밝혀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킨 뒤 개인정보를 확인하겠다며 김씨의 거래은행 등을 캐물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김씨가 머뭇거리자 A수사관은 “믿지 못하면 피의자로 정식 수사를 받으라”고 야단치면서 의심나는 게 있으면 검찰청 대표전화로 연락해 자신을 찾으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 번호는 실제 포털사이트에 나온 민원전화였다.

김씨가 전화를 걸어 수사관을 바꿔달라고 하자 방금 전 자신과 통화하던 A수사관이 전화를 받았다. A수사관은 “요즘 보이스피싱 범죄가 잦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금융위원회도 확인해보라고 했다. 다시 실제 금감위 대표번호를 통해 A수사관과 함께 사건을 맡는다는 B위원까지 통화한 김씨는 이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씨의 주거래은행 직원 1~2명이 범행에 연루된 것 같다고 해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A수사관은 “수사에 협조하면 사기범도 잡고 혐의도 벗을 수 있다”며 은행잔고를 모두 비워 현금과 수표로 보관할 것을 지시했다. 현금 일련번호 등 계좌 추적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형사소송법으로 약식조사한 것으로 남편에게 알리면 피의자 전환돼 정식수사될 수 있으니 알리지 말라”고 겁을 줬다.

누명을 벗기 위해 김씨는 계좌에 있던 8000만원을 현금과 수표로 인출해 이 중 현금 5000만원을 자신을 찾아온 금융위 직원이라는 남성에게 전달했다. 그가 들고 온 금융위 서류에 서명까지 해줬다. 공문 형식의 이 서류에는 금융위원장 관인과 담당관 서명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수표로 인출한 3000만원까지 내놓으라는 A수사관의 종용에 김씨는 그제야 이 모든 게 보이스피싱인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나머지 수표를 받으러 온 금융위 직원 사칭범을 잡았지만, 이미 A수사관은 잠적한 뒤였다.

김씨의 남편은 “그동안 보이스피싱이라면 조선족이 어눌한 말투로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홈페이지 대표번호로 통화하고, 공문서까지 제시하는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황당한 사기에 당한 아내는 자책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과 경찰에도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는 “전화로 계좌잔고를 모두 찾아달라고 하는데도 은행에선 인출이유를 물어보지 않더라”며 “경찰도 ‘이거 못잡는다’고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이 사건은 청주상당서에서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체포한 사기범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으나 조직 최말단인 수금원일 뿐 몸통에 대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

충북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0월말까지 도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92억7000만원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1065명으로 지난해 전체 피해자 627명을 이미 넘어섰다. 특히 검찰이나 경찰, 금융감독원 등을 사칭한 ‘사칭형’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16년 8억원에서 지난해 15억원으로 87.5% 급증했다. 휴대저화 해킹이나 악성코드를 활용한 앱 등 고도화된 수법이 결합되면서 피해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의 30.3%에 달한다. 이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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