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빅뱅(Big Bang) 직후 인플레이션이 종료되자 우주는 최초의 원자 탄생이 가능한 온도로 급격히 식어갔다. 그리고 수소가 등장하자 곧 헬륨, 그리고 리튬(Lithim)이 자기의 탄생을 기다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3개의 원소는 스스로의 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서로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 인력(引力)이 수없이 많은 질량을 확보하자 원시상태의 별에 해당하는 물질의 집합은 스스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 열과 압력이 핵자들의 집합조건을 제공하였고 드디어 26개의 양성자까지 융합하기에 이르렀다.

빅뱅 후 최초 물질의 탄생에 거론되는 3개의 원소 중 하나로써 그리고 최초의 고체이자 최초의 금속으로써 그리고 지각(地殼)의 0.006%에 불과한 희귀한 원소로써 리튬의 존재감은 담대하다. 스웨덴 화학자인 아르프베드손(Afrwedson)이 1817년 독자적 원소로써 ‘돌’에서 추출한 영예를 위해 그 이름을 ‘돌=리튬(Lithim)’로 했지만 1개뿐이 없어서 갖는 최외각 전자의 자유로움은 전기의 저장소인 ‘배터리’의 물질로 이용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9년의 노벨 화학상은 ‘리튬’의 배터리물질로의 등극을 가치화 했다. 스탠리 휘팅엄(M. Stanley Whittingham)은 리튬의 배터리 이용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존 구디너프(John B. Goodenough)는 그 용량을 대폭 늘렸으며,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알칼리 금속으로써의 폭발위험을 요시노 아키라(吉野彰)가 제거했다. 이들 3명에게 공동수상의 영예를 안기면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노벨상 강대국의 위상을 스웨덴 한림원은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로써 이웃 일본은 화학분야에서만 역대 8개의 노벨상을 움켜쥐었고 과학분야를 통 털어서는 22개의 일본 국적자를 노벨상 수상자로 세계에 소개하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결정되는 10월이 되고 수상식이 거행되는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되면 ‘왜 우리는 학문분야에서 노벨상을 탈 수 없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분석들이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일본이 수상의 영예를 안는 해에는 더욱 그렇다. 올 해도 이 현상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석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교육과 입시제도에 대한 논란과 같이 본질과는 관계없는 이름들을 거론하는 정도의 해프닝을 연출할 것이다. 그래서 이들 노벨상 수상자들이 그저 자신의 일에 집중한 대가가 아닌 어떤 특별한 교육정책의 산물임을 적시하고 우리의 교육제도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 없는 비난을 생산해 내는 업적을 산출할 것이다.

수능의 공평성이 정시의 확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놀라운 발상이 일반인이 아닌 일개 국가의 교육책임자의 생각에서 도출될 수 있는 일이라면 노벨상 수상 같은 사건은 교육의 말단과도 연계될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은 그저 수능점수로 대학과 학과를 선택할 뿐이며, 인격과 적성에 의한 학과 선택은 점수가 아주 높아서 아무 곳을 지원해도 합격이 보장된 불과 몇 명의 수험생이나 점수가 너무 낮아서 학과의 선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수험생들에게만 한정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수시는 정시의 불공정성을 극복하고 미래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시대에 적응할 기회를 줄 수 있는 제도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취지가 이 나라의 교육현실에서 왜곡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초기부터 이미 알고 있던 일에 불과하다. 정시냐 수시냐의 기술적 선택에 우리의 교육현실을 개선할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교육의 본질이 인간성의 순수한 발현과 연계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인 것이다. 교육의 격을 일반 국민에 대한 시혜를 통해 인기를 생산하는 방법으로 극소화 시킨 댓가는 정치가들이 지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희극을 보지 않아도 될 자유를 우리 국민들은 언제쯤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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