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12월, 한 장 남은 달력도 절반 가까이가 지났다. 차분해지기보다는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각종 동아리 모임, 출판기념회, 동문의 밤, 감사의 밤 등 공식, 비공식적으로 송년 모임이 줄을 잇는 때다.

‘올해 가기 전에 밥 한번 먹어야지’하는 자잘한 모임까지 휴대전화에 수첩에 탁상용 달력에

빤한 날이 없다.

‘반가워야 모임이고, 즐거워야 행사다’, 필자가 정한 모임에 대한 정의이자 참석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물론 지켜본 적은 없다. 모임을 가려서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입맛에 맞는 모임이라는 게 얼마나 가당찮은 ‘감상적 오류(pathetic fallacy)’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참석한 모임이 ’역시나‘인 경우도 많고, 어쩌다 투명인간처럼 빈자리나 메꾸다 오는 경우엔 축낸 시간이 아까워 씁쓸하다.

모임을 주관 하는 처지에서도 입장은 비슷하다. 애써 좋은 뜻으로 마련한 자리에 참석자가 저조해 헛심이 새기도 하고, 끝나고 나서도 참석자들에겐 어떤 가치와 즐거움이 주어졌는지 개운치 않을 때가 많다.

장구한 세월 인류사회가 발전해온 역사의 기저에는 만남과 모임이라는 문화의 퇴적층이 자리 잡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인(人), 류(類), 사(社), 회(會)가 다 ‘모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인(人)은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고, 류(類) 역시 ‘무리’를 의미하고, 사(社)만 해도 ‘단체’를 나타내고 이미 고려·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의 단위로 쓰였다고 한다. ‘모일 회(會)’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대표적인 글자다.

모임은 의식주처럼 시간과 경비와 노력이 소모되는 삶의 한 방식이며 이미 익숙해진 생활양식이다. 모임에 있어서 정석은 없다. 제철을 맞은 듯이 매일 밤이 즐거운 사람도 있고, 잦은 모임으로 인해 탈진 상태의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기도 한다. 여전히 모임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 돼 있기 때문이다. 모임에도 경제원리를 적용한 합리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모임이 너무 많다 싶으면 다이어트를 하면 된다. 모임의 우선순위를 정해 구조조정을 하면 된다. 시기도 방법도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려있다.

모임을 완전히 비즈니스의 일환이라고 보는 측도 있고, 모임에 대한 정서적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아 상대적으로 실망스러워하는 측도 있다.

애경사만 해도 그렇다. 요즘은 애경사가 현대판 ’품앗이‘형태로 바뀌어 결혼청첩장, 행사초대장, 부고장, 방명록까지 스마트 앱으로 통하는 시대다. 경조금도 계좌이체, 카카오페이, QR코드를 이용한 신용카드결제 등 온라인이 대세다. ’……그래도 애사는 꼭 참석해야지.‘, 고릿적 ’두레 문화‘의 향수를 고집하면 ’꼰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모임에서 중요한 덕목은 역할 분담과 주제 파악이다.

단체에 가입했으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권리와 의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회비만 다 냈다고 해서 회원으로서 모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籍)을 두었으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은 없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해서 모임 전체에 영향을 줘서도 안 되고, 회원이네 임원입네 이름만 걸어놓고 뒷전에서만 어정거려서도 안 된다.

엔도 아키라는 그의 저서 ’모임의 기술’에서 ’세일(sales)‘을 위한 기술의 최상위 단계를 모임과 세미나에서 찾고 있다.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세일‘의 관건은 고객과의 신뢰구축이고, 신뢰구축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모임을 통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뢰 관계가 모임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얘기다. 신뢰 관계는 마음의 군살을 덜어냄으로써 생긴다.

모임을 위해서 뭔가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로 어느새 모임을 즐기고 있는 멋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하지 말고 즐겨라‘ 모임의 경제학에서 내 거는 구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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