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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사실 충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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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일보
  • 승인 2019.12.12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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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이제 4살 된 조카의 딸아이가 크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어휘력과 때 묻지 않은 행동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조카는 아이를 예쁘게 키우기보다 자연스럽게 키우려 노력하는 것 같다. 불편한 원피스나 치마대신 트레이닝복을 입히고, 리본이나 핀을 꽂아주는 대신 머리를 벙거지 모양의 단발로 잘라준다. 그래선지 아이는 어느 곳에서나 행동이 자유롭고 놀이터에서도 거침이 없다. 아이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잠을 자는 모습도 매우 편안해 보인다.

아이의 엄마는 아기 때 엎어져서 잠을 잤다. 그 무렵엔 그것이 유행이었는지 그렇게 해야 광대가 나오지 않고 두상이 예쁘다고 해서 동생은 두 딸을 모두 낳자마자 엎어서 키웠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조카들은 성인이 되었어도 두상이 예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팩트와 통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소개하는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일반화한 본능’과 ‘사실’이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을 빌어 설명한다.

1974년 어느 날, 한스 로슬링은 스웨덴 작은 도시의 슈퍼마켓에서 빵을 사던 중 위험한 아기를 발견한다. 빵을 고르는 엄마 뒤에서 아기가 유모차에 반듯이 누워 잠든 모습을 본 것이다. 당시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풋내기 의사였던 한스는 잠든 아기를 보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고 했다. 한스는 아기 엄마가 놀랄까봐 아기 몸을 살짝 뒤집어 엎드린 자세로 뉘었는데 마침 이 모습을 본 엄마가 깜짝 놀라 공격을 하려 했다.

한스는 재빨리 상황설명을 하면서 “나는 의사다. 영아돌연사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와 관련해 부모가 알아야할 새로운 공중보건지식이 있다. 위를 보고 누운 자세로 아기를 재우지 마라, 토하다가 질식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고, 아기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스는 뿌듯한 마음으로 쇼핑을 마쳤다.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엎드려 자는 습관이 보급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때부터였다. 당시 의사와 간호사는 의식을 잃고 들 것에 실려 온 군인 중 위를 보고 똑바로 누운 사람보다 바닥에 엎드린 사람의 생존율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위를 보고 누우면 토할 경우 토사물에 질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엎드려 누우면 기도에 틈이 생겨 질식할 위험이 적었던 것이다. 이 관찰 덕분에 군인은 물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그 후로 이 새로운 발견은 아주 쉽게, 지나치게 널리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공중보건지식이 되었고, 아기를 엎드려 재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행처럼 전 세계에서 아기를 엎어 키우는 사이 놀랍게도 영아돌연사망이 줄기는커녕 되레 높아졌다는 데이터가 나왔다.

그리고 1985년 홍콩 소아과의사들이 엎드린 자세가 영아돌연사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의식을 잃은 군인이 똑바로 누운 채 구토를 하면 죽을 수 있지만, 의식 잃은 군인과 달리 잠자는 아기는 반사 신경이 작동하고 있어서 똑바로 누운 상태에서 구토가 나면 옆으로 돌아눕는다는 것. 그런데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어린 아기는 엎드려 있으면 기도를 확보할 만큼 고개를 돌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유럽의사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홍콩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18개월이 지나 마침내 그 방식이 뒤집힐 때까지 유럽과 미국의 많은 의사와 부모가 그래왔듯 한스 역시 영아의 질식을 막기 위해 10년 넘게 똑바로 누운 많은 아기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엎드려 눕혀왔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광범위한 잘못된 보건상식의 일반화 때문에 수천 명의 아기가 죽었다.

위 사례는 좋은 의도라는 명분 뒤에 숨은 ‘광범위한 일반화’가 ‘사실’과 다를 경우, 얼마나 위험한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예이다. 사실을 알고 나니 끔찍하다. 어쩌면 잘못된 일반화 때문에 조카들도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에 노출됐던 것이 아닌가.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이유에 대해 10가지 극적인 본능을 소개하면서, 극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생각 도구를 제시한다. 가짜가 진짜처럼 둔갑되는 현대사회에서 ‘사실 충실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책,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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