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수업의 구조 2

학교는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우수의 역사’를 주입하는 장이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교과서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하나의 장이었다.

도요토미 히테요시나 가토 기요마사는 교과서에 잘 등장하는 인기스타이고, 그들에 의한 조선침략은 도덕‧국어‧역사에 반드시 등장하여 찬양받는 사건으로, 그들은 ‘조선정벌’의 이미지로서 지금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다.

교과서는 모두 조선을 피정복자의 위치에서 파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 아래서 재일조선인 학생이 맛보는 심경이 어떤지 일본인 교사나 학생들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확실히 전전(태평양전쟁 전)의 교과서는 전 교과서에 걸쳐 아시아 침략의 고취를 하나의 기조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역사교과서는 이를 계통적으로 배열하고 침략을 긍정하는 역사인식을 심어 왔다 거기에서 한일관계는 지배‧피지배의 관계사로서만 교육되었다. 그 한 장면을 오임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절차를 밟아 완수되었지?” “너는 이 일을 일본인, 아니 제국 신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이런 것은 가능하면 회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첫째, 교실 안의 모든 친구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되면, 나의 사고선(思考線)은 완전히 엉켜버리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짜릿하면서 몸 전체가 마취된 것처럼 혼탁해지기 시작한다. 왜 우리 부모는 조선인이란 말인가 하며, 고민하면서 겨우 그 결과 황은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귓불을 붉게 물들이며 가까스로 대답하여 합격점을 받을 때, 어쩐 일인지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볼을 적셨다. 왜 내게서 찝찔한 눈물방울이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구태여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조선인이라는 것을 싫어도 다시 확인해야하는 사실에 대한 낭패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실 안에서 조선이 제2류의 존재임을 지적‧심리적으로 확인시켜 나가는 작업은, 반면 재일조선인 학생을 에워싸고 있는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에게 일본을 제1류의 존재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것으로 인해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확인 작업은 눈물을 수반할 만큼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더욱이 조선은 제2류라는 인식은 양국의 권력관계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민족 생활의 차이까지 상하로 서열화 시킬 만큼 한없이 확대되었다.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의 종교생활은 형식상 신불(神佛)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생활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본관제를 취하고 있던 조선의 가족제도에는 가문(家門)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한 민족에 따른 습속의 차이까지 수업의 장에서 비웃음거리의 대상으로 전화(轉化)되고 있었다. 오임준은 그에 대한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가문은?” 이런 질문을 받자 잠시 깊이 생각한 뒤 아이들은 교사에게 제각기 자랑스럽게 자기의 가문에 전승되는 도안을 설명해 나갔다. 그것이야 어찌됐든 간에 그 다음으로 나에게 떨어진 “종지(宗旨)는?”이라는 질문은 몹시 곤혹스러웠다. 모두 일제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분명 의심과 멸시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없습니다” “뭐, 없어?”, 뜻밖이라는 듯이 말하던 선생님은 갑자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지, 조선인에게는 종지 같은 것이 없었지,” 이것 참 딱하다. “와!” 하는 폭소가 쏟아지고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김치, 흰옷, 제사 등 풍속‧습관의 차이까지, 교실 안에서 열등의 표시로 간주되는 그러한 편견이 수업 과정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사회와 학교는 조선인 자신의 눈으로 구성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표현과 계승을 배제하고 금지 억압하였다.

이러한 곳에 갇힌 재일조선인 학생은 지적‧인격적 성장의 도상에서 민족적 특성을 계승하는 길을 차단당하는 조선인으로 성장해 가는데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되었다.

이처럼 민족적인 토대를 제거 당하면서 수업의 장에서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만을 배우게 될 때, 거기에서는 차별적 인간관계와 차별적 지식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이것을 밀쳐낼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덮어씌웠던 것이다.

이것은 몇 년에 걸쳐 축적되어 점차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옭아매고, 급기야는 지적‧심리적으로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지경에까지 접근한다.

동화교육 체제는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조선인 부정이라는 내면적 상황을 만들어 냄으로써, 역으로 ‘일본화’로의 유도를 추진하는 반교육적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화의 길을 따라서

일본이 패전할 당시 18세였던 김시종(金時鐘)은 “유년시절부터 소년기에 이르는, 혹은 사춘기를 거치는 단계에 완전 일본 교육, 특히 황민화라는 천황의 적자로서 교육받은 매우 일그러진 소년기를 갖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그동안 생활 속에서 깊숙이 스며든 일본을 떨쳐내고 진정한 조선인이 되는 수련에 온힘을 다 쏟아 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유‧소년기에 침투된 일본의 그림자는 재일조선인의 인간성을 깊이 옭아매고 있었다.

그를 이토록 ‘일그러진 소년기’를 원초적으로 규정한 것이 일본어였다. 김시종도 조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품을 경우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한 부모가 그에게 “조선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고”, 때문에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어를 전혀 몰랐고, 조선의 글자는 ㄱ, ㄴ도 몰랐다”는 식으로 조선어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일본어만 쓰며 18세까지 성장하였다고 한다.

일본 사회에서 성장하는 재일조선인 소년들에게는 놀 때에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도 처음부터 일본어 밖에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를 통해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그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형성을 근원으로부터 훼방 받고 일본에서의 동화를 내면으로부터 달성해 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에 각인 된 것이 밑바탕을 이루어, 광복 후 다시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해도 조선에서 태어난 세대와는 이질적인 조선인의 초상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가 되었다.

고사명은 이러한 이질화와 관련하여 자신을 다음과 같이 해부하고 있다. 그는 일본어에 의해 존재 그 자체가 왜곡되었음을 지적한다.



나는 24시간을 전부, 꿈속에서까지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어로 지껄이고, 일본어로 비명을 질렀다. 나 스스로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들어온 일본어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어를 통해 조선어를 이해한다는 몹시 성가신 과정, 아마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선인이 될 수는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도구로서의 언어를 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성‧사고‧표현이라고 하는 존재와 활동, 그 모든 것에 일본인적인 감각이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언어 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재일조선인 소년은, 고사명이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이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본인이 살아갈 주체적인 입장은 어디에도 없는” 그런 갈기갈기 찢어진 존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인 자신의 손으로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이 아니라는 이 모순을 극복하는데 몰두하였지만, 광복 이전에는 이러한 모순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오로지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을 심각화시키는 방도만이 권력에 의해 추구되었다.

재일조선인 성인들의 사회적 활동이 봉쇄된 상황 아래서는 이 아이들은 일본의 국가와 사회의 조류에 몸을 의탁하는 길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유년기를 지나 소년기에 들어서면 오임준이 고백한 것과 같이, “조선의 역사, 문화, 전통, 풍습, 진로의 모든 것에서 차단 당해온 소년은 또한(시대극 영화와 함께/인용자) 일본의 대중서적을 차례차례로 찾아 읽게 되고, 일본어에만 흥미를 갖는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일본의 학교와 소년 문화에 둘러싸인 속에서 싹트는 지적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빠져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일본어로 모든 것을 흡수하는 형태로 일본의 여러 문화 세례를 온 몸에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재일조선인 소년들에게 있어서 아동들의 읽을거리가 주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쇼와(昭和) 초기에 소년기를 보낸 자들에게는 다치카와문고(立川文庫), 쇼와 1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자들에게는 소년구락부(少年俱樂部)를 축으로 한 고단샤문화(講談社文化)가 각각 비조선인화에 각별한 작용을 한 듯하다.

이때에도 가난 때문에 신간을 구독하기 어려워 헌책을 구입해 보거나 빌려서 보았다. 두 재일조선인 작가의 술회를 들어보자.



◇장두식의 술회

이즈음부터 나는 다치카와 문고본을 헌책방에서 빌려와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이불 속에서 밤늦게까지 책 읽기에 열중하였다. 사루토비 사스케(猿飛佐助) 등의 사나다(眞田) 10용사를 비롯해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 고토 마타베(後藤又兵衛), 다미야 보타로(田宮坊太郞), 도자와 하쿠운세이(戶澤白雲齋), 쓰카하라 보쿠덴(塚原卜傳),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등 헌책방에 있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하루에 두세 권씩 독파하였다.

나는 이 책들을 빌리는 돈을 딱지(맨코) 치기에서 딴 딱지를 팔아 충당하였다. 내가 왜 이런 책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난은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임에 비해, 황당무계한 이러한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자신에게 없는 세계, 즉 자신이 마치 그 책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피가 끓고 온 몸이 들썩거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 이것이 나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그 전까지 내 머리에는 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박혀 있었고, 특별히 이를 수치스러워하거나 숨기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다치카와 문고본을 읽으면서 가능한 한 조선인이라는 의식에서 등을 돌리는 그런 일을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전차를 탈 때는 먼저 어머니를 좌석에 앉히고 나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오임준의 술회

나의 독서 범위는 대개 ‘소년구락부’라든가 고단사에서 발행된 오락잡지 같은 종류였다. 그 중에서도 ‘괴걸 흑두건(怪傑黑頭巾)’이라든가 ‘환상의 성’, ‘거친 바다(荒海)의 무지개’나 야마나카 미네타로(山中峯太郞)의 군인 소설, 사토 고로쿠(佐藤紅綠)의 ‘영웅 행진곡’ 등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게재된 잡지는 발매와 동시에 사보는 것이 아니라, 부잣집 아이나 또는 친구들에게 싼값에 사정사정하여 빌려 본다. 그 지면 위에 펼쳐지는 것은 소년의 천진난만한 동경에 싸인 미래의 꽃밭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일본 소년이 주축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었으나, 나는 여기에 찰싹 달라붙어 자신이 조선 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이와 같이 아동들의 읽을거리가 여러 소년 문화, 서민 문화는 일본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이상으로 재일조선인 소년들에게 복잡한 작용을 하였다. 거기에서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증발되고 일본인적인 감각과 상상력이 무의식중에 배양되었다.

물론 거기에 함께 뒤섞여 천황제 의식이나 군국주의 사상도 흡수되어, 황국 소년의 토대도 마련되었다. 소학교 3학년에서 중퇴한 김희로도 책을 좋아해서 근처 책방의 단골 공짜 손님이 되어, ‘노라쿠로(のらくろ)(당시 유행한 만화)’나 ‘모험 단키치(冒險ダン吉)’에 매료당하고, ‘이와미 주타로(岩見重太郞)’ 등에 푹 빠졌다.

그 중에서도 ‘서주전차대(西住戰車隊)’를 읽을 때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대장이 강의 수심을 재는 장면을 읽으면서 “장꼴라 자식들! 하며 화가 나 어쩔 줄 몰랐고,” “나도 전차대에 들어가고 싶은 한 소년의 꿈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특히 히로세(廣瀨) 중좌나 노기(乃木)대장은 아이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언어적 동화, 문화적 동화에 논리를 세우고 일본화의 필요성을 자각시키는 것이 학교 교육에서의 역할이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통적인 천황제 내셔널리즘의 교화란 이미 동화의 토대를 구축한 재일조선인 소년에게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의 한 예가, 1941년 효고현 협화교육연구회의 조사에서 확인된다.

현 내 약 20개 초등학교 초등과 3학년에 6학년까지의 조선인 학생 579명, 일본인 학생 1241명을 대상으로 한 「반도 학생 아동의 도덕의식 및 생활환경 조사」에 의하면, 효행‧정돈‧천황에 대한 충의의 3개 항목을 중요도에 따라서 순서를 매기라는 질문에서 제 1위가 충위 86%, 다음이 효행 8%, 정돈 6%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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