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각 지역의 경찰서 사찰계에서 남로당과 농민조합 가입자 명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사람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왜 농민조합에 들게 되었을까? 혼란한 해방정국을 짚어보기로 한다.

1926년이 전라남도 무안에서 농민조합이 발족 되어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 119개가 만들어지더니, 1928년에는 307개가 생겨난다. 그 배후에는 조선농민총동맹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30년대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좌익의 성격을 띠더니,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으로 활동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

일제는 적색농민조합에 탄압의 강도 높이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1937년 이후는 모든 농민운동은 불빛을 잃는 싶더니 ”소작료통제령 1939년““이 공포되자 일제 하의 농민운동은 중지되고 말았다.

해방공간의 치안 공백기 동안 농민들의 소작료 불납 운동 등이 일어났다. 즉각 조선공산당은 농민대중의 열기를 흡수하여 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로 한다. 박헌영은 즉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주겠다. “ 라고 하며 농민을 현혹한다. 요즘 정당의 포플리즘과 전혀 다르지 않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10월 3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토지는 농민에게 적정분배“,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의 토지를 몰수“ 등을 외치며, 소작료 인하 투쟁을 지시한다. 농민이 7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농민을 끌어들이고 농민들의 투쟁역량을 강화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우선 과제는 ‘3ㆍ7제 소작료 운동’에 당력을 집중하기로 한다.

반면,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건국준비위원회의 식량대책위원회의 활동을 막고 그해 12월 일본인의 재산은 미군정에 소속된다고 천명한다. 그리고 모든 인민위원회 활동을 중지 시키고, 행정기관을 접수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건준ㆍ인민위원회가 치안 유지와 적산관리 및 행정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실상 이것이 제주 4.3과 이어지는 불씨가 된다.

조선공산당으로 농민들의 지지가 쏠려버렸다. 다급해진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3:1 제 소작제“ 법령을 선포하여 최고의 지불 한도를 3분의 1로 못 박는다. 그러나 이것이 기울어지고 있는 농민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1945년 12월 8일 조선공산당의 조직단체인 전농(全農)) 즉, 전국농민조합총연맹(全國農民組合總聯盟)이 결성되었다. 전국 13개 도에 도 연맹, 군 단위에 188개 지부, 면 단위에 1,745개 지부를 두었으며, 조합원 수는 약 330만 명에 육박하였다. 북한에도 전농 북조선연맹이 발족 되었다.

전농은 “일제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와 빈농에게 토지분배”, ”소작료는 3·7 제“ 등의 유혹적인 구호를 내걸고, 북조선의 정치노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였다. 빈농에게 토지분배 한다는 선전과 미군정의 ”양곡수집령“이 일제하의 “공출제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주쟁은 농민들의 호응을 쉽게 끌어낼 수 있었다. 미군정은 즉각 3:1제 소작령을 공포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식량정책은 성공하지 못하고, 박상희에 의하여 1946년 ‘대구 10.1 사건’을 발화시킨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1947년 8월 31일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을 만들어 초대 총제에 올라 좌익농민단체에 대처하여 좌익으로 들끓는 난국에 대처한다.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사건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에 통제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사찰계에서 확보한 농민조합 명단은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의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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