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1419년 5월(세종1년), 왜선 50여 척이 서천 비인현에 나타났다. 조선조정은 난리가 났다.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태종은 세종에게 말하였다.

“주상, 지금 적들이 발광하고 있는 비인현에서 싸울 게 아니라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가 비어 있으니 그곳을 치도록 하시오.”세종은 즉시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임명하여 전함 227척, 군량미 65일분, 병사 1만7000명을 통솔하여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이종무는 젊은 시절, 장군이던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옹진만호가 되어 서해안에서 왜구를 섬멸한 후 상장군에 오르게 된다. 1400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척결한 공적으로 공신 반열에 올랐다가 이제 삼군도체찰사가 되어 대마도로 출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에 대한 태종과 세종의 신임은 하늘 끝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이종무장군은 대마도의 왜구를 징벌하기 위한 병선을 꾸린다. 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26척을 모우니 227척의 전단을 갖추게 되었다. 1만 7285명의 군사와 65일간 먹을 수 있는 군량미까지 챙겨, 1419년 6월 17일 견내량에서 출정식을 가졌으나 날씨는 좋지 않았다.

견내량은 인근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인 지석묘들이 있었고, 석부, 석검, 후육무문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한, 거제와 통영의 경계를 이루는 거제 제1관문이다. 예부터 나루터라는 뜻의 진두(津頭)로 불렀으나, 1170년 고려 의종이 무신정변을 피해 거제도로 도망 오면서 이 해협을 건넜다고 하여 전하도(殿下渡)라 부르기도 한다.

해협이 좁은 곳은 500m 남짓하여 조류가 병목 현상으로 급하게 흐른다. 급기야 이곳의 청정한 바닷물의 흐름은 미역의 품질을 최상품으로 만들었으며, 임금님의 수라상을 책임지는 영광을 얻게 해주었다.

대마도 징벌 조선 수군이 좁고 물살이 거센 이 견내량에 굳이 출정식을 갖게 된 이유는 하루에 두 번 식 방향을 바꾸는 조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썰물에 배를 올리면 힘들이지 않고 큰 바다로 나가고, 또 큰 바다에서 만나는 쿠로시오 해류에 올라서면 단숨에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거제도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어 대마도 쪽의 먼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대마도 출정의 전초기지로 더할 나위없는 장소였다.

병선들이 대마도로 돌진하였으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주원방포로 회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틀을 기다렸다가, 6월 19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드디어 거제도 남쪽 주원 방포에서 대마도를 향해 닻을 올렸다. 좋지 않은 날씨가 오히려 병선의 이동을 엄폐시켜주기도 하였다. 이종무장군은 동백섬 뒤편의 어둠 속에 병선을 하룻밤 묻었다가, 6월 20일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마도 아소만의 두지포(頭知浦:오자끼) 에 쏜살같이 접근하였다.

징벌군은 가옥 1,939호를 불태우고 왜구 114명을 사살, 21명을 생포했다. 그리고 중국인 포로 130명을 구출하지만, 산에 숨어든 왜구를 공격했다가 18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대마도주가 물러갈 것을 애원하여 음력 7월 3일에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이때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으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 이종무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교서를 내려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며 비통해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코드가 맞는 군신은 끝까지 감싸야 하는 모양이다. 조국을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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