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기 논설위원 / 한국교통대 교수

[동양일보]2010년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컬렉션에서 쿠쉬나메(Kush Nama)라는 페르시아(現 이란)의 서사시의 판본이 발견되었다. 쿠쉬나메는 쿠쉬라는 영웅의 전설을 노래한 것으로 시대적인 배경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아랍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이다. 멸망한 페르시아의 왕자 아브틴(Abtin)은 페르시아 유민을 이끌고 배를 타고 중국을 거쳐 신라에 도착한다. 신라에 정착한 아브틴은 국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와 당의 전투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후에 신라 공주인 프라랑(Frarang)과 결혼하게 된다. 아브틴은 신라인의 안내로 아내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프라랑이 낳은 왕자 파리둔(Faridun)은 아랍군을 물리쳐서 페르시아 유민의 원수를 갚는다. 파리둔은 이후에도 신라왕에 오른 외삼촌과의 교류를 이어가게 된다. 이상의 내용이 쿠쉬나메에 기술된 신라와 관련된 부분으로서 기술된 모두를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대 이란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페르시아는 18세기 이후 러시아, 오스만 제국, 아프간 왕조의 침공을 받았고 19세기 이후에는 석유로 인해 러시아와 영국의 전쟁터가 되었다. 1908년 중동 지역에서 상업적 가치를 가진 최초의 유전이 이란의 마지드 이 슐레이만(Masjid-i-Suleiman)에서 발견되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석유가 국가전략의 핵심요소가 됨에 따라 중동국가들도 서구 열강과 맺었던 원유 판매 수익에 따른 배분 비율을 보다 자국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자 하였다. 당시 이란의 수상이었던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는 영국과 이란의 합작회사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려 하였다. 당연히 영국은 이에 반대하면서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하려 했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항공유의 상당 부분이 이란산 석유에 의존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영국의 대이란 봉쇄는 물론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의 국유화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란은 1970년대 우리나라 경제개발에서 중동 건설 특수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1977년 방한한 테헤란 시장이 당시 서울시장과 양국 간의 우호증진을 위해 서울-테헤란 간 도로명 교환을 제안하여 서초동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삼릉로를 지금의 테헤란로로 이름을 변경하고 테헤란에도 서울 거리를 만들었다. 테헤란로는 한때 미국의 실리콘벨리에 비유해서 테헤란벨리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국내 IT 벤처기업의 중심이 되었고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은 판교테크노 밸리 등으로 많은 기업들이 빠져나가긴 했으나 우리나라 IT 벤처의 상징으로서 테헤란로의 가치는 여전하다.

우리나라와 약 6,600 km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이란이 1500년 가까이 우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란은 역사적으로 열강들의 침략에 시달려왔다는 점에서도 우리와 유사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국민적인 정서 측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공교롭게도 이란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2006년 이란에서 방영되었던 우리나라 사극 ‘대장금’의 역할이 지대했는데 당시 대장금의 시청률은 90%에 육박했다고 한다. 대장금의 주연 배우가 선전했던 국내 에어컨을 필두로 해서 2017년 기준 이란 가전시장에서 국내 제품의 점유율은 60% 이상이며 현대 자동차의 이란 내 수입자동차 시장점유율은 2위에 달했다. 최근의 K-pop 열풍까지 더해진 이란에서의 한류 확산으로 인해 테헤란 대학 한국어 강좌 개설, 이란 세종학당의 한국어 수강신청 경쟁률이 10:1이 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은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이란과의 긍정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2018년 미국의 대이란 제재 복원에 따른 한국의 이란산 원유수입 중단 등으로 인해 일부에서는 반한여론이 조성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올해에는 미국이 이란 간의 갈등 고조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우리나라의 동참을 요청할 수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국제 사회를 핵으로 위협하는 이란의 현재를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만을 가지고는 현실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명제임에 틀림없다. 한미동맹과 한-이란과의 관계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이상을 지키면서 현실문제를 냉철하고 치밀한 계산으로 풀어내고 실천해야 한다. 여기에 쿠쉬나메의 아브틴과 우리의 대장금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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