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전후 책임은 완수됐는가?

재일조선인과 결혼해 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된 한 일본인 여성 작가의 지적을 빌려보면 다음과 같다.



봉건사상의 잔재에 대해서는 요란스레 떠들어 대고 제각기 반성도 하고 개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이 다른 나라를 점령 지배하고, 압박해 온 국민으로서, 식민지에서 힘 하나들이지 않고 모든 이익을 짜낸 35년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국민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후 1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진보적인 사상가에 의해서도 직접적으로 논의된 전례가 없다. 전쟁 책임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는 있었어도, 거기에서 전쟁 중에 징용으로 끌려와 그대로 주저앉아 고통 받으며, 생활하는 60만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되돌아본 일도 없었다.…우리 일본인은 타국과 타민족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시정할 수 있는 힘과 도덕을 가진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순리에 따르는 국민이 됨으로써 비로소 순리에 따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교육과 관련해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물을 때, 저자는 이상에서든 침략 책임에 대한 반성의 미약, 동화교육 체제의 지속, 민족 차별사상에 사로잡힌 국민의 세 가지 점이 전후 책임을 창출해 내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 고리는 동화교육 체제의 지속=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민족성을 파괴하는 도구로서의 교육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폐지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 속에서 침략 책임을 깊이 자각할 때에 민족 차별사상도 바꿔나가는 일도 추진될 수 있다.



●침략책임의 중층성

이와 같은 상황의 본질은 ‘일본인이 본 재일조선인’이라는 시점을 ‘재일조선인이 본 일본인’이라는 시점으로 역전시켜 볼 경우 한층 더 분명하게 부각된다.

재일조선인은 조국과 관계에서 독립국의 재외공민으로서 광복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차별과 동화를 계속 강용 당하면서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국가‧사회의 체질은 ‘식민지’ 의식과 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그치지 않고, 넓게 한일관계에서의 여러 문제는 모두 일본의 침략적사고의 자세에서 발생하고 있다. 광복 후의 경우에는 전전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책임을 해결하지도 않은 채, 그 위에 전후의 침략적 자세를 중첩시켜 온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후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제반 문제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과 전후 책임과의 중층적인 침략 책임을 묻는 사상적인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후를 이렇게 출발하도록 한 원인은 당연히 미국의 일본 점령과 조선 침략정책, 그 아래서 행해진 일본정부의 조선 적대정책이라는 정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치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문제를 방기하고, 전후의 조선 적대정책이라는 행위를 권장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다시 만들어 간다는 시점과 출발점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그 모든 책임을 여기에다만 미룰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 측의 일로서 침략책임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책임을 어떻게 속죄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수립해 나갈 것인지를, 일본의 진로와 관련되는 일로 토론하고 사상‧운동‧정치적 과제로 삼아 여기에서 전후 일본이 하나의 출발점을 규정하여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오랜 침략으로 축적된 역사와 의식에 물들어 그러한 과제가 있다는 것조차 패전 직후는 물론이고, 전후 얼마동안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예를 들면 전후 일본의 사상동향의 기조는 전쟁책임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는 일은 적었다.

군국주의에 의한 피해라는 국내적 시점이 선행했고, 군국주의의 가해에 가담한 일본이라는 아시아적 시야는 미숙했다. 이러한 사상의 왜곡과 후진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 가는 정부와는 별도의 행위를 전개시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정하게 대중적인 확산을 보이며 국민적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한일조약이 정치과제로 부상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한일관계의 영역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을 느끼는 일 없이 침략적 자세를 지속하며 ‘전후’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전후’를 새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마땅히 전후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략책임에 대한 자각이 더디고, 여전히 민족적 차별사상에 사로 잡혀 정부의 ‘전전’적인 소행을 허용하면서 거기에 가담해 왔다는 점에서, 일본 국민도 또한 전후책임 문제와 관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장에서는 제2부의 서론으로서 전후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의 근저에 ‘전전’=동화체제의 사상과 정책이 계속 살아 있음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후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는 비단 재일조선인 교육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일관계의 제 문제를 일본 국민의 사상변혁의 문제로 끌어당겨 생각해 보고자 할 때, 어떻게든 식민지 통치 책임 및 전후 침략의 책임이라는 이중의 자각‧시점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2. 갈라진 조선인 아이들의 생활

●네 갈래로 갈라진 아이들의 생활

전후, 조선의 아이들은 4지역으로 나누어져 생활하였다. 조선아이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생긴 현실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 지배가 야기한 교육적 책임은 그저 단순히 식민통치시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전후 상황을 만들어낸 역사적 책임도 이어진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정치는 조선 아이들의 분단과 억압에 일조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한국인 모두의 공통된 소망으로 되어 있다. 이 소망은 지난 남북공동성명에 의해 겨우 구체화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일본은 광복 후부터 지금까지 민족적 통일의 염원을 짓밟고, 민족분열을 강행한 것은 분명 미국의 남한 진주라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역사적 책임은 마땅히 일본제국주의가 져야 한다. 특히 조선 아동들 세계의 분할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명확하다.

왜냐하면 아동의 생활과 성장의 내용은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를 받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고, 그 만큼 정치‧사회체제와의 관련은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조선의 아이들은 한반도라는 단일 지역에서 공통된 정치‧사회체제 아래 생활하고 성장해 왔다.

‘조선 아동’으로서 단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생활 체험을 쌓아 왔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식민시대에도, 그 아픔의 질은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조선 아동’으로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미지가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지금 조선 아동은 실제로는 각기 다른 정치‧사회체제 아래 놓인 4지역으로 분할되어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동일한 ‘조선의 아동’이면서도, 내실을 살펴보면 4가지 유형의 아동으로 파악해야하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는 1945년 이후 나타난 새로운 상황이다. 이 4가지 유형을 일본에 가까운 순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에 사는 아동 : 일본인의 의식에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조선인으로서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고 있는 아동(재일동포)

(2) 남한의 아동 : 반동과 차별로부터의 광복, 민주주의의 실현을 갈망하고 있는 ‘식민지적인 아동’의 모습

(3) 북한의 아동 : 사회주의 국가의 아동으로서, 조선민족의 자부심을 특히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자각을 가진 어린 혁명가의 상을 추구하는 아동의 모습

(4) 중국에 사는 조선의 아동 :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입장에 처해 있으며, 조선의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중국 국민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아동

조선의 아동은 현실적으로 이처럼 정치‧사회체제가 서로 다른 4지역으로 분할되어 각기 다른 생활 유형 속에서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는 벌써 25년이나 계속되고 있다(1970년 기준)

이는 같은 민족으로서 매우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아동을 분열시킨 자

그렇다면, 조선 아동의 생활을 이렇게 분할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 역사적 책임은 바로 일본제국주의가 져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통치는 조선 민중으로부터 토지를 약탈했고(1912년 토지조사령), 생산물을 약탈(1918~1933년 산미증산계획)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살길을 찾아 할 수 없이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남쪽의 사람들은 일본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 수는 각각 약 200여만 명에 달했다. 광복이된 후에도, 그 때까지 닦아 놓은 생활기반도 있고 해서 그곳에 그대로 잔류‧정주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은 그 재주(在住)한 방식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1970년 기준) 중국에는 125만명의 조선인이 중국 국적을 갖고 살며, 길림성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마련되어 있다. 이들 조선인들은 광복이 되었을 때에 잔류와 귀국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 받고 자기의 의지에 기초하여 잔류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귀화가 아니고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일원이 된 것이다. 거기에서 아동들은 중국 국민으로서 교육을 받았지만, 조선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조선족 선생님에게 조선어로 가르침을 받았다.

중국에서 한족과 조선족은 민족적으로 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며, 조선족의 민족적 형식은 완전하게 보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일조선인의 경우, 귀국 의지를 정치적으로 저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조선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재외공민으로서 민족적 권리를 억압당하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교육시키고, 키우는 것이 최대의 급무로 되어 있었다.

일본이라는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을 방해받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와 그 산물로서 중국‧일본으로의 조선인 이주라는 역사적 현실에다, 그에 덧붙여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정치 상황 하에서 미국은 남한을 점령하고 남북분단을 강행함과 동시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에 억류하는 정책을 취했다(미국의 책임).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무장 해제된 뒤에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자주적 인민정권을 탄압하고 군정을 속행하며, 본래 일본군의 무장해제선인 38도선을 정치 경계선으로 바꿔치기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의 여러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리고 8월에 통일선거의 실시가 결정되었지만, 미군은 이 결정을 짓밟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강행(5월10일), 이승만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은 통일선거를 실시해(8월10일), 북한에서는 99%, 남한에서는 비합법 하의 지하 선거라는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77%의 투표율을 보였다. 북한에서는 이 선거로 인하여 최고인민회의가 조직, 이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설됐다(9월9일).

미군은 이러한 조선 민중의 총의를 유린하고 ‘대한민국’을 세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 이후로 남북분단이 제도화되고, 미군과 이승만(후에 박정희)정권은 남한 사람들의 통일운동을 계속 억압했다(오자와 유사쿠의 견해).

남한의 교육은 숭미반공(崇美反共) 군사교육이었고, 아동들은 민족적 굴욕과 빈곤, 무권리의 식민지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예를 들면 1965년 3월의 ‘한국’정부의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남한 학생 470만 명 중 112만 명(24%)이 결식 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 학급당 평균수용 학생 수는 85명(서울)이라는 수치가 보여주는 열악한 교육조건에, 주한경제원조처 교육국과 그 밖의 근거를 통해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교육의 영향이 극히 두드러졌다.

중국에 사는 조선인은 별도로 하고, 오늘날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살아나갈 길을 찾고 있는 조선인을 세 지역으로 분할하고, 이질적인 생활 유형을 강요하고 있는 사태에 대한 현재적 책임은 주로 미국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일조약 비준 이후는 일본의 국가권력도 이러한 분할의 고착화에 직접 일조했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화의 유산 위에 미국의 남한 식민지화 정책이 중첩되어, 조선 아동들의 지역적 분할이 강행되고, 남한과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 아동들에게 크나큰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조선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한반도의 모든 아동 목표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일본 국민으로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근대 백년의 역사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처음에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1945년 이후에는 미국에 협력하면서 그 자신도 재일조선인 아동을 억압하는 형태로 조선 아동의 행복과 번영을 계속적으로 파괴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그 책임은 엄격히 일본에 물어야만 한다. 또한 일본 국민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바꾸도록 거듭 노력할 책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오자와 유사쿠 교수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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