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얼마 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류큐왕국의 문화재가 화재를 만나 불타는 소동이 일어났다. 관광객들은 불탄 지붕 위로 핸드폰을 들이대고 시커멓게 그을린 기왓장을 담아 넣느라고 법석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왕국의 기와의 역사는 고려의 ‘기와 장인’에 의하여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의아스러웠다.

1982년 오키나와의 가마터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이 기록이 선명한 기와가 나왔다. 이러한 고려기와가 우라소에성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나왔을 때,일본계 학자들만 와에 기록된 '계유년'이 조선 초‘1393년’이라고 왈가왈부할 뿐 국내 학자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고려의 숫기와를 이어 처마를 장식하던 수막새가 류큐왕국의 기와와 비슷하다면, 두 기와 모두 가운데 둥근 원 주위로 연꽃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무늬가 완전 판박이라면, 정말 가슴 두근거리는 역사적 사건이 숨어 있지 않겠는가.

기와의 연대측정 결과 1273년(또는 1393년)이며,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기와와 제작기법이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도는 강화도에서 1천척의 배를 타고 이동해 온 삼별초가 궁성을 짓고 대몽 항쟁을 벌였던 곳이다. 1270년 고려 원종은 몽고에 항쟁하다가 힘에 부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궁성을 옮긴다. 몽고의 말발굽을 고려사가 받아들이기로 한 슬픈 결정이었다. 최씨 정권에 대한 염증에 기인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즉시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배중손이 대장이되어 항거의 깃발을 이곳 진도에 꽂았다.

1271년 5월 홍다구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다. 진도의 삼별초는 몽고에 항전하며 한 국가 자격으로 일본과 공동전선을 펴려고 하였다. 그들은 '몽고가 곧 일본을 침략할 것'이라며 '식량과 병력을 협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하고, 원나라 사신의 일본 내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한다. 김통정은 제주도로 궁성을 옮겨 2년을 버티다가 1273년 4월 160척의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굻고 말았다. 1300명은 포로가 되고 김통정은 자결한다.

이제 남은 저항군민은 일시 몸을 숨겼으나 제주인들과 융화할 형편이 못되었다. 처음에 제주에 입상할 때, 방어하는 제주민을 무력으로 제압했던 터라 그 앙금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제주에서 살아남은 일부 삼별초는 ‘보트피플’이 되어 쿠로시오 해류에 피난 배를 올렸을 계연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제주도 남쪽으로 700~800㎞ 떨어졌으나 해류의 흐름을 이용하면 3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섬, 훗날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었을 계연성이 충분한 섬, 오키나와(沖繩)는 항상 중국과 일본에 앞서 고려를 앞에 놓고 선린국으로 대접해오고 있었다.

삼별초의 세력이 한국사에서 사라지자마자, 오키나와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성장하고 지역 세력권이 형성되면서 갑자기 큰 성이 축조되는데 그 기술의 유입 경로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이 건국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삼별초"라는 의견이 더욱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별초는 항몽사의 단편에 머물지 않고 동아사아의 교역과 문화 창달의 교량 역할을 한 셈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모여든 후, 1429년 왕국이 건국되고 450년간 류큐는 해상문화를 꽃이 되었다. 그러나 1609년에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은 류큐 왕국은, 일본 지배 속에서 조선·중국과 교역을 이어오다가 일본 메이지정부의 폐번치현 정책으로 1872년 류큐현이 되었다가 1879년 오키나와현이 되면서 ‘류큐’라는 지구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참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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