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강준희 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동양일보]‘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를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위의 시는 자신이 천형(天刑)의 업보로 살이 문드러져 는적는적 떨어져 나가는 문둥이의 박행한 생애를 살면서도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절규, 꽃 청산 봄 언덕의 보리피리와 푸른 노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옌다는 파랑새의 시인 한하운(韓何雲)이 나병 환자 수용소가 있는 남해안의 소록도 황톳길을 가면서 가슴 저리게 토해낸 ‘전라도 길’이란 시의 전문(全文)이다.

이 시는 또 ‘소록도 가는 길’이란 부제를 달아 소록도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기사슴처럼 생긴 섬이라 하여 소록도란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섬은 하늘의 벌을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천형의 한센 씨 병(나병) 환자가 1070여 명 수용돼 있다.

그런데 이 한센 씨 병을 다시 말해 살이 는적는적 떨어져 나가고 손톱 발톱이 후둘러빠지고 눈썹마저 없어 모두가 피하고 싫어하는 문둥병 환자를 하루 이틀 1~2년도 아닌 장장 35년을 제 살 만지듯 어루만지며 ‘소록도의 어머니’ 또는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사랑을 듬뿍 쏟는 이가 있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1996년 5월 17일 국립 소록도병원 개원 80년을 맞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바 있는 62세(당시 나이)의 마리안느스퇴거 수녀로 그녀는 이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고 있다.

‘소록도는 내 고향입니다.’

오스트리아가 고국인 그녀는 소록도에 인생을 걸고 매일을 하루같이 나병 환자 수발에 한 몸을 불살랐다.

그래서 잠시 잠깐 궁둥이 땅에 붙일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1994년 본국에서 준 훈장도 받으러 갈 시간이 없다며 사양, 결국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소록도까지 찾아와 전해주었다 한다.

그녀는 1962년 2월 인스부르크대 간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달려와 감염되지 않은 나환자의 아이들을 돌보다 1966년 인도에서 6개월간 나병 교육을 받고 돌아와 본격적인 소록도 생황을 시작했다 한다.

‘저와 같은 해에 소록도에 온 여자환자 한 분은 제 어머니와 인상이 비슷했어요. 그래서 제가 늘 어머니 어머니 하고 따랐죠.’

그런데 그 환자는 3년 전 아흔셋의 나이로 그녀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이런 그녀는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만큼 슬퍼 한없이 울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또 병이 완치돼 섬을 떠나는 몇몇 사람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조리 털어 나눠주었고 1994년에는 대구의 한 정상인 여성과 완치 단계의 환자 김모(40)씨와 결혼을 성사시켜줘 여간 기쁘지 않다고 했다.

이런 마리안느 수녀는 5년에 한 번씩 3개월의 휴가를 받아 본국에 가는데 이때마다 휴가를 한 달 또는 두 달 만에 반납하고 소록도로 달려왔다.

소록도의 환자들이 걱정돼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런 그녀는 마지막 소망도 이 소록도에 묻히는 것이라며 주님이 데려갈 때까지 나환자들을 돌보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겠노라 했다.

아! 마르안느 수녀!

우리는 그녀를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사해 동포주의 화신으로 박애정신과 아가페의 거룩한 메시아로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오 거룩한지고,,,,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