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이정근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동양일보]공무원 임용 면접시험을 마치고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적이 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고 알려진 그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테라로 향하는 길로,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해 현재 많은 한국인이 찾고 있다. 나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 길을 버리고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길을 선택했는데, 이미 다녀온 친구로부터 프랑스 길에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순례길이 마치 ‘팔공산’ 등산로 같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시작해 목적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탈라까지 675㎞를 가는 데 26일이 걸렸는데 확실히 한국 사람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17일차 스페인 국경을 넘기 전에 처음으로 한국 순례객을 만났다.) 순례길은 개인마다 걸음 속도, 하루 이동 거리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가끔 동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길에서는 대부분 혼자 걷는 일이 많다. 그래서일까 중간중간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이 더 생생하게 기억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중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순례 11일차였다. 생각보다 짧았던 코스 덕에 본격적으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할 때 즈음 목적지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늘 그랬듯 맥주를 마시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다리 마사지를 하며 몸을 푸는데 주인이 와서 ‘오늘 손님은 너밖에 없고 우리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니 손님이 오면 알아서 알베르게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상식 밖의 행동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미 3일차에 이런 경험을 겪은 나는 능숙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렬했던 오후의 햇살이 사그라질 때 즈음(이것은 내가 저녁을 먹을 시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설렁설렁 마을 중심가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작은 중심가로 향했다. 식당 간판이 없는 바람에 식당을 지나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아저씨에게 식당을 물었는데 자기가 식당 주인이라며 들어오란다.

식당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었지만 예상외로 컸다. 그 큰 공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까무잡잡한 동양인 1명, 맥주를 쉴 새 없이 마셔대는 배 나온 주인, 그리고 식당만큼이나 오래된 서부 영화를 보고 있는 식당 주인 친구 3명이 전부였다. 주인은 나에게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물었고 나 혼자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약간의 실망감을 내비치곤 곧 정성을 다해 나를 위한 정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8유로인 순례자 메뉴는 식전 빵, 올리브, 수프, 맥주, 샐러드, 메인인 새끼 돼지 요리, 디저트 푸딩까지 포함돼 있었다. 환대에 감격한 동양 청년은 1.5유로짜리 와인 한 잔을 시켰는데 0.5L짜리가 나왔다. 배가 찢어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주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포트와인 한 잔까지 기어코 내줬다.(계산하는데 커피까지 마시고 가야 한다고 했지만 배불러서 마실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푸근한 인심을 느끼고 내일 아침거리를 사기 위해서 길 건너 과일가게를 찾았다. 충분한 돈이 없었기에 장고 끝에 가장 저렴한, 그리고 가장 커 보이는 오렌지 두 알을 손에 쥐고 계산대에 섰다. 주인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 순례자인지를 물었다. 그렇다는 나에게 그녀는 환히 웃으면서 오렌지 두 알은 자신이 주는 선물이고 돈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주인은 순례를 하고 싶지만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며 대신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준다면 그걸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 마음이 담겨 어느 오렌지보다 커다란 오렌지를 두 손에 하나씩 들고 텅 빈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따듯함이 가득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