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교장

한희송 ESI교장

[동양일보]인식론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는 상기설(想起說)이다. 그는 이성과 감정의 요람으로써 혼(魂)과 육체를 지적했다. 육체의 죽음은 쉽게 노출되는 반면 혼은 죽음과 연관시키기 힘든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둘은 존재론적으로 분리 되어야 하며 또한 육체가 죽은 후의 혼에 대해서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은 이를 위해 윤회설과 유사한 개념을 도입했다. 인간의 이성은 혼에 머물고 감정은 육신에 머문다는 판단은 자연히 혼과 현재의 육신이 결합하기 이전부터 인간의 이성과 그의 결과물인 지식이 존재해 왔다고 해야 논리에 맞았다. 따라서 이를 상기해 내는 것이 지식에 대한 인식적 방법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善)’이던 또는 ‘악(惡)’이던 논리적 정의가 필요한 개념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혼에 자리를 틀고 사는 이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바이었다. ‘산파술(産婆述)이란 대화법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플라톤에 의해 정리된 소크라테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오히려 그 질문에 자신이 대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상기설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알고 사실을 감정이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옳든 그렇지 아니하든 그의 이론은 교육과 지식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개념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긍정적 단면을 보여준다. 지식인은 어둠을 거두어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육과 교육개혁을 정의할 때에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근본 환경은 바로 교육을 통해 지식 자체를 전달할 수 있는가의 판단과정에서 발생한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고기를 잡아주는 것’을 비교함에 있어서 현실에 들어가면 늘 '고기'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사건이고, '고기 잡는 방법'은 고기가 없는 상태에서 고기가 필요한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교육은 늘 후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고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고기를 주는 일과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에 대한 선호도는 비교할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는 '고기'가 우선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고기'자체를 지식으로 둔갑시키고 이를 시혜적으로 주는 일에 교육이란 이름을 부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류대신 논리적 안도를 경험한다. 이것이 교육과 교육개혁을 설정하는 일에 있어서 왜곡이 상존하는 원인을 이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육과 지식은 '고기'를 주는 일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고 이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 지식에 머물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고기 잡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통해 한 인간은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할 능력을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관한 정의 자체를 남이 수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직업을 택하고 그 업무에 종사하는 것은 교육의 성과 중 피상적 사건에 머무르는 일이다. 그것이 마치 인간 존재자체의 질을 결정짓는 것으로 호도하는 순간 인류역사는 그저 물질적 요소들의 확대와 제로섬(Zero-Sum)을 위한 비물질(非物質)적 요소들의 쇠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이러한 문제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 많은 노력까지도 필요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세상과 그를 받치고 있는 지식, 그리고 이 둘의 건강한 연결을 도모하는 유일한 방법인 교육을 본질로 환원시키지 못하는 사회에서 문화와 철학은 이성적으로 존재할 기반을 잃는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부조화가 이 나라를 물려받을 젊은이들을 좌절케 하고 있다. 이제라도 고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불편하고 힘든 일을 해 낼 세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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