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올겨울 눈 소식은 끝났으려니 기대하지도 않던 차에 펑펑 눈보라가 쏟아졌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얼음이 풀린다는 ‘우수(雨水)’를 코앞에 두고 곳곳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만큼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내리는 눈을 본 지가 꽤 오래됐다. 이상기온 탓으로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라 작정하고 눈 오는 모습을 감상하기로 했다.

나쁜 기억은 망각이 약(藥)이고, 좋은 기억은 추억의 몫이라 했던가.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오랜 시간의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는 것을 보면 눈 오는 날에 대한 추억의 온기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음이다. 약한 듯 강한 것이 추억의 힘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가끔 1970년대 영화 ‘러브스토리’의 가슴 시린 명장면이 떠오른다. ‘눈 장난-Snow Frolic'이라는 주제곡과 함께 하얗게 펼쳐진 순백의 눈밭을 뒹굴며 보여준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의 풋풋한 사랑의 몸짓들이 50년 세월을 건너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눈(雪)이 주는 매력은 무엇일까. 포근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고요함이다.

외롭고 쓸쓸한 적막감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삶을 돌아보라는 달콤한 휴식 같은 포근함이다.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쉬고 싶다’라는 신호를 무의식적으로 보내고 있다가 풍성히 내리는 눈을 만나면, ‘위로와 평안’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전 구글 회장인 에릭 슈밋이 SNS에 매달려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컴퓨터를 끈다. 휴대전화도 끈다. 그러면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쁜 우리에게 잠시만이라도 자신만의 ‘눈 오는 날’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한 경제전망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통합과 공천이 맞물린 정치권도 어수선하고 무거운 뉴스와 사건 사고가 줄을 잇는다.

내리는 눈발을 보며 당장 출퇴근 걱정부터 하게 되는 삭막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현주소다.

내리자마자 금방 녹아 없어지는 작은 눈송이가 쉼 없이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잠시 내려놓으란다. 휴식도 삶의 일부라고. 위로도 평화도 분주함 속에 있지 않다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노라면 ‘멍 때림’에서 오는 평안함이 느껴진다. 근심·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라고 하는 마법의 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눈(雪)이 주는 매력 중의 하나는 대상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덮어주는 넉넉함에 있다. 주택가 골목, 아파트 단지의 공터, 야트막한 동네 산에 온통 흰 눈꽃 세계가 열리고 있다. 조건 없이 감싸주는 순백의 위로가 펼쳐지고 있다.

‘눈 오는 날 강아지는 왜 뛰어다닐까 - 발이 시려서’, 물론 우스개다.

나풀나풀 내리는 눈송이에 반응해서 강아지가 깡충거리며 노는 즐거운 춤사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내며 느꼈던 희열이 기분 좋은 기억으로 쌓여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눈(眼)에 눈(雪)이 들어가니 눈물인가, 눈물인가’, 말장난이 됐든 말랑한 감성이 됐든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눈 오는 날, 꼭 누구와 함께일 필요는 없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오늘 같은 날에는/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과/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면/예쁜 추억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하얀 눈 속에 돋아 난 기억 위로/다시 수북이 눈 쌓이면/다시 길을 내며 나눌 이야기들‘ 목필균 시인의 ’겨울 일기-함박눈‘ 이란 시의 일부다.

가끔은 인생의 달력에 ‘눈 내리는 날’이라고 동그라미를 치고 자신에게 추억의 ‘쉼표’를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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