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충북대학교 강사

원혜영 충북대학교 강사

[동양일보]<존엄성이 가진 문제 제기와 시민사회의 혼동적 개념 이해>

김용해의 ‘인간 존엄성의 철학’이 우리에게 준 숙제는 근원적이고도 진실한 개념을 사회공동체에 어떻게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에 있다. 자신의 실존과 공동체의 실존의 모든 단계를 존엄(dignity)이라는 단어로 일치해나가는 것에는 단순히 평등성이라는 개념을 넘어섬이 요구된다.

천부인권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실존적인 갈망과 실현의 의무를 함께하는 것이다. 인권, 실존에 대한 자각은 삶 속에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에서 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력이다. 모든 인간의 품위와 인격존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인격(person)과 품위가 존엄의 시대를 열 수 있는 토대가 되지만, 인간 사이의 인정과 예의가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존엄성이란 단어에 주목하게 되는 현시대를 맞이하는 맥락에서, 자유로움이 방종의 형태로 흐르지 않고 진정한 해방이 되고자 하는 그 지점에서, 시민사회는 인권 또는 인격이 존엄성과 묘하게 겹쳐 인식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인권은 권력기관으로 나쁜 계몽주의 산물일 수 있다. 즉 국가를 넘어서야 하는 것으로, 이것은 국가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예를 들어 병역은 국방의 의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국민의 의무와 충돌하게 된다. 유럽국가에서는 병역 대신 다른 일로 대체근무를 허락한다. 평등하게 모병제를 도입한다.(김용해, 『인간 존엄성의 철학』 2015. 서강대학교출판부. 참조)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떠한가? 휴전이라는 상황은 아직도 전쟁 진행 중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전쟁은 기술전이고 정보전이기에 국방의 의무를 종교적 신념에서 거부할 때,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에 따른 국가의 권력은 다른 모색을 찾아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존엄성의 입장에서만 다룬다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가? 만약 모든 사람이 종교적 신념이나 다른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한다면 국가는 존재할 수 있는가? 국가의 존재가 없다면 인간의 존엄이 지켜질 수 있는가? 국가라는 테두리 속에 보호받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권이나 존엄성이라는 명목으로, 국가는 최소시간 근무제에 52시간이라는 최장기간을 도입하기도 한다. 사업장을 가진 사장들은 최소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인해, 사장 자신이 최장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노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소근무시간에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면 패널티를 받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사장이 온전히 고용하던 시대는 지났다. 예전의 갑을관계는 역전되었다. 사장이 노동자에게 잘 보여야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노동자의 학대를 막기 위해 시행된 정책은 사업자가 운영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역할까지 하게 한다.

CEO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기찬 시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인권이나 존엄성을 앞세우는 요즘의 젊은 노동자는 숙련기간이 지날 때까지 회사에 남아 있지 않으려고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단기간의 월급만을 챙기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을 서슴없이 한다. 벌어들인 월급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진정한 인권,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알기도 전에 훼손된 방식을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타자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기준으로 하는 존엄성 인정이, 자신만의 자유와 권리라는 명목으로 전도되어 무분별하게 행해진다. 사업운영자의 존엄성을 노동자가 배려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인격은 귀책 능력의 주체이다. 인격은 18세기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우의 가면처럼 역할이 교대 가능하다. 인격이 예지와 감성의 두 세계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본다면, 자연의 전 메커니즘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자기 입법자라는 인격성과 구별된다. 이런 구별을 하기 시작한 칸트에 따르면, 인격은 여전히 자기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이런 존재들에게서 상대적 가치만을 우선으로 하는 인격을 찾을 수 있겠지만, 목적으로 대우하려는 절대적 가치인 존엄성을 찾기는 힘들다.

“존엄이 자연적이고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이유에서(칸트사전, 2009. 참조; 平田俊博 『柔らかなカント哲學』 晃洋書房, 1996), 자신만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는 이런 존재자(노동자)들에 의해 윤리와 책임이라는 양날의 칼은 시민사회에서 존엄성과 인격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안겨 준다.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격성을 지켜주려는 국가의 시범들이 시민사회에서 올바르게 인식되지 못한 채, 인권 및 존엄성이란 이름으로 오염되고 있다. 만연한 방종과 다른 형태의 무질서로 인해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내세운 본래의 의도는 애매하게 훼손된다. 통제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주의를 펼치게 된다면 어쩌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될지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진정한 인권과 존엄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도기 과정에 놓여있다. 정착되려면 수많은 우여곡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대한국민 헌법은 인권과 존엄성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한정하기에, 우리는 좀 더 넓은 테두리[場]에서 인권, 인격, 존엄성에 대한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권, 인격, 존엄성 자체를 확장된 개념으로 다루고 있기에 넓은 범위와 주제로 바라보게 한다. 인류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윤리기준에서 바람직한 의도를 도출해 내지 않더라도 존엄성이 가진 지평은 넓다.



<존엄성의 의미와 요청된 전통들>

존엄성은 존귀, 존경, 존중과 다른 의미이다. 존귀는 지위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다. 존경은 나이, 인격, 조건이 탁월한 인물에 대해 나타내는 감정이다. 존중은 특별한 이유나 원인으로 인해 인물에게 표하는 감정이다. 존엄성은 조건 없이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대우하는 것이다. 존엄성은 존재가치나 생명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출발한다.(김태창 참조) 우리는 존귀, 존경, 존중을 존엄과 혼동하여 사용하지만, 칸트가 말한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을 고스란히 따른다면 파악하기 쉽다.

인간 존엄성을 전환적으로 바꾼 칸트의 이러한 명제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자고 한다. 어떠한 의도나 수단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인간관계는 항상 주고받는 것에 습성화되었다.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연관성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하며 붓다에게 보시하고 소원을 빈다. 절대자와의 교감에서도 수단과 목적은 혼용된다. 인간은 진정한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을까?

삶이 자기 목적성을 갖고 운행될 때 완전성을 갖는다는 칸트의 말은, 자기 삶의 주체자가 자신이며 목적임을 명시한다. 인종, 언어, 종교, 성별 등의 많은 차별적 조건과 권력에서도 벗어난 본래 인간존재의 귀중함을 드러낸다.(김용해, 위의 책. 참조) 태아, 유아, 장애 또는 인격을 갖추지 못한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권력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인간 자체가 가진 존엄성은 온전하게 고귀한 존재를 드러내기 힘들지 않겠는가? 인간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욕망이 존재하는 한, 존엄성은 은폐되어 그 존재의미를 인간사회 속에 완벽하게 뿌리내리기 어렵지 않을까?

칸트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존엄성을 거론한다. 인간의 인생운용과 자기결정의 자유, 다시 말해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자율성에 근거짓는 자체가 윤리적 개념이다. 칸트가 말한 존엄성은 어떠한 것과 등가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며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가치보다 탁월한 점으로 존엄성을 소유한 그 자체가 목적이며 윤리이다.(김용해, 위의 책 참조) 이용하거나 대가로 환원하려고 드는 것은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자유와 자율성이 강조된 인본주의이다.

헤겔이 인간과 신의 합일에서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유한자로 한정하고 신에게 무한한 원천이 있음을 아는 인간의 설정은, 인간이 보편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이치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기에 존엄하다고 규정한다. 이런 논리는 칸트와 차이가 있다. 칸트는 인간 자율에 힘을 싣고 있지만, 인간중심적인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반면 헤겔이 말한 존엄성은 피조물의 구원에 달려 있기에, 무한히 열려있는 신의 지평에 인간 자신을 맡긴 채, 인간 자체의 목적이 발생하지 못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초월적인 실체가 개입되지 않은 칸트의 존엄성과 개입이 허락된 헤겔의 존엄성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가’와 ‘인간을 탈출할 수 있는가’에 따른 복잡한 문제로 발전한다.(김태창 참조)

한민족의 신화에서도 인간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의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 신의 존재가 인간이 되길 바란다. 왜 그랬을까? 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환웅은 인간이 경험하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다양한 경험을 하고자 한다. 인간만이 가진 다양한 경험과 성격 안에 존엄성은 내포되어 있다. 곰이 변한 여자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 신화는 환웅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願化爲人) 의지를 주요하게 다룬다.(김태창 참조) 인간만이 가진 존엄성을 갈구한 신의 존재는 특별하다. 그는 신을 매개하여 의존하거나 신이 가진 완벽함에서 오는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인간존재가 가진 다양한 측면을 사랑한 것이다. 존엄성은 인간존재가 가진 생태적 환경의 다양성이다.



<불교 에피소드를 통한 존엄성 이해>

불교에 관련한 에피소드를 통해 존엄성에 관한 난해한 주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대인도 코살라 마을에 살인을 일삼아서 항상 손에 피를 묻힌 채 사는 ‘앙굴라말라’는, 위험한 살인자이다. 앙굴라말라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어떠한 죄책감도 없었다. 자신 앞에 무심히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살인하여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서 목걸이를 만들었다. 살인을 즐겼다. 그의 극악무도함은 붓다도 알았다. 어느 날 붓다가 앞날을 예측해 보니, 앙굴라말라의 어머니가 그의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붓다는 앙굴라말라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의 앞에 나타난다. 앙굴라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가지고 붓다를 살해하기 위해 뒤를 쫓았다. 그의 걸음으로 붓다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붓다를 향해 “거기 서라”고 앙굴라말라가 말했지만, 붓다는 “나는 처음부터 서 있었다. 너야말로 속히 서라”고 했다. 앙굴라말라는 “붓다 너는 걸어가는 중이면서 ‘나는 처음부터 서 있었다.’라고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붓다는 말한다.

“앙굴라말라여! 실로 나는 서 있노라. 나는 항상 살아있는 모는 것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마음을 버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무런 자재의 마음도 없이 날마다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서 있고, 너는 서 있지 못한 것이다”(‘불설앙굴라경’ 참조)



앙굴라말라는 그 말을 듣고 무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출가의 길로 들어선다. 붓다는 그를 잡기 위해서 달려온 왕에게 “사람이 그가 행한 지나간 잘못을 회개하면 그는 세상을 비취기를 마치 구름을 떠난 달과 같은 것이오. 내 법을 들어 안식을 얻은 앙굴라말라도 아무도 해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한결같이 보호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오.”라고 설명한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물러나며 앙굴라말라에게 보시를 행한다. 붓다는 앙굴라말라를 향해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잔인한 앙굴라말라도 인간이 가진 존엄성에 대해 깨닫는다. 붓다가 행한 무차별적인 대자비한 마음이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레비나스가 말한 ‘적극적인 타자성의 철학’을 앙굴라말라의 에피소드와 비교해서 말하기 어렵지만, 레비나스가 말한 주체적 자아 중심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한다는 것에서 앙굴라말라가 행한 살인의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여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붓다가 앙굴라말라에서 “…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무런 자재의 마음도 없이 날마다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있다. …너는 서 있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는 말에 함축되었다.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감지한 붓다와 앙굴라말라와 차이를 극명하게 한다. 즉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앙굴라말라는 ‘서 있지 못한 것’으로 상징한다. 그 후에 붓다는 “…앙굴라말라도 아무도 해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한결같이 보호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라면서, 살인자가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쳤다는 것을 왕에게 알린다. 왕도 붓다처럼 그를 존엄하게 예우한다.

살인자에게 인격을 요구하기보다는 존엄성으로 대우하는 것, 사형수가 고통받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권리,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태아를 인정하는 것,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장애인들에게 부여하는 권리 등은 존엄성을 인정함에서 나온 것이다. 타자에 대한 뜨거운 배려는 존엄성에서 나온 온전한 인간애이다. 인격(person)이란 용어는 어원적으로 사람에게 한정되어서, 감정과 욕구를 가진 동물과 무생물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에도 인격이 있느냐’고 역설적으로 되물으면서 인간에게만 인격성을 한정 짓는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삶과 앎이고 문화’이다. 하지만 인격이 모든 인간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으며, 개보다 못한 인간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인격에 관련한 복잡한 설명보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솔직한 이유는, 아퀴나스가 ‘개에게도 인격이 있는가?’라는 질문 속에 인간에 대한 실망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로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서양전통이 자연스럽게 작동한 것으로도 보인다.

존엄(dignity)이라는 용어가 특별한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에게도 적용되는 사례가 동양전통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존엄이란 용어가 서양전통에서 나왔지만 자유롭고 다양한 관점을 인간의 테두리에 제한하였다. 동양전통에서는 존엄이란 단어조차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을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우주까지 확장하여 거론한 종교와 철학을 만날 수 있다. 우선 동학과 불교에서 볼 수 있다. 동학에서는 신과 인간을 일체로 보는 신비주의 경향이 있다. 시천주(侍天主) 사상부터 경물(敬物)사상까지 하늘, 사물, 자연, 인간 등을 공경하고 존중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어 존엄성을 모든 세계로 확장한다. 존엄이 존경, 존귀, 존중과는 다른 의미로 풀이하더라도, 동학이 의미하는 종교적이고 문화적 전통은 존엄의 범위를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기에 독창적이다.(김용해 책, 참조)

불교에서는 “우주인생의 근본원리를 진여(眞如)라고 하고 이 진여가 비정물(非情物)에 있는 것을 법성(法性)이라고 하고, 유정물에 있는 것을 불성(佛性)이라고 규정한다. 진여와 법성과 불성은 처해 있는 곳에 따라 명칭만 다를 뿐이지 그 실체는 같다.”(金東華, 『佛敎倫理學』 又文社, 1971; 원혜영, 『陽明學』, 「山川草木의 깨달음을 밝히기 위한 敍說」, 2019. 참조) 따라서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동물과 산천초목까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천태사상의 본각(本覺)은 존엄성을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 진여의 증득(깨달음)은 “완전히 자재로운 이타 활동의 실현이며, 깨달음의 주요한 목적이기에 법성을 가진 산천초목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가졌다.”(김동화 위의 책; 원혜영 위의 책. 참조) 자신의 존재의미를 동물과 산천초목도 알고 있다. 인간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면서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과 등가적으로 보는 존엄성은, 불교 전통에서는 동물과 산천초목으로 확대하여 실천에 옮기고 있다.

여기서 불교 경전인 자따까(Jataka)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자따까의 주요 목적은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를 깨우치도록 돕는 것에 있다. 사슴과 인간의 이야기지만 존엄의 가치를 동물을 빗대어 인간세계로 확대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의미 있는 권력자가 존엄성을 파악하고 받아들인다면 공동체로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



인도 북부 베나레스 숲 근처에서 아름다운 사슴이 태어났다. 아기는 반짝이는 보석과 같은 눈을 가졌고, 입술은 숲에서 가장 붉은 딸기 같았으며, 발굽은 윤이 나는 석탄처럼 검은빛이었으며, 작은 뿔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몸은 완벽한 여름의 새벽처럼 황금빛이었다. 사슴이 자라게 되자, 500마리의 사슴들이 주변에 모여들었고 사슴 왕 반얀(Banyan)으로 알려졌다.

한편, 멀지 않은 곳에 또 한 마리의 아름다운 검은 사슴이 태어났는데, 황금빛이었다. 그도 때가 되어 한 무리의 사슴 500마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사슴 왕 브랜취(Branch)로 알려졌다.

그 당시 베나레스 왕은 사슴고기를 좋아해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나가서 사슴을 죽였다. 사람들은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든, 일을 멈추고 왕의 사냥 무리에서 일해야만 했다. 이렇게 방해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사람들은 곡식을 덜 재배하게 되고 장사 수입도 줄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베나레스 왕을 위한 커다란 사슴동산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왕은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이 혼자서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슴이 물을 마실 연못을 만들고, 풀을 뜯을 나무와 풀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런 준비를 한 뒤에, 문을 열어두고 근처 숲으로 가서 막대기와 무기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물건들을 사용해서 사슴 떼를 사슴동산 함정으로 몰아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반얀과 브랜취의 사슴 떼가 갇혀버렸다.

왕은 기뻐서 사슴동산에 갔다. 그는 커다랗게 다 자란 뿔을 가진 두 마리의 황금빛 사슴에 아름다움에 탄복하여 두 사슴을 죽이지 않게 명령하였다. (중략) 사슴왕 반얀은 브랜취 사슴을 불러 회의를 했다. “마지막에는 누구도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을지라도, 상처와 부상으로 불필요하게 고통받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왕은 하루에 한 마리의 사슴고기만 원하기에 우리가 매일 한 마리를 뽑아서 도마 위로 보냅시다. (중략) 어느 날 브랜취 사슴의 무리 가운데 우연히 새끼 밴 사슴이 차례가 되었다. 자신과 태어나지 않은 새끼를 생각하듯, 다른 사슴도 생각한 암사슴은 브랜취 사슴에게 “새끼를 낳을 때까지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의 차례를 채울 수 있습니다.” (중략) 브랜취 사슴과의 이야기에 실패한 엄마 사슴은 사슴 왕 반얀에게 가서 자신이 처한 곤경을 설명했다. 사슴 왕은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중간에 규칙을 바꿔서 당신 차례를 다른 사슴에게 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반얀은 사형집행인의 도마 위에 자신의 황금빛 목을 눕혔다. (중략) 왕실 요리사가 도마 위에 있는 자원 희생자를 죽이러 왔을 때, 요리사는 왕이 살려두라고 했던 두 마리의 황금빛 사슴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어 두려웠다. 그는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왕은 놀라서 동산으로 가서 황금빛 사슴에게 말했다. “사슴 왕이여! 내가 그대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대가 다른 사슴처럼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슴 왕 반얀은 대답했다. “오, 인간의 왕이시여! 이번에는 불행히도 새끼를 밴 암사슴이 죽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암사슴은 태어나지 않은 새끼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슴을 위해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내게 간청했습니다. 나는 암사슴의 처지가 나의 것처럼 느껴졌고, 그녀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 어린 것이 새벽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이슬도 맛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내 차례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는 다른 사슴에게 죽음의 고통을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대한 왕이시여! 암사슴과 태어나지 않는 새끼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베나레스 왕은 압도당했다. 권세가 있는 왕이었지만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오 위대한 사슴 왕이여! 사람들 가운데서도 나는 그대와 같은 이를 본 적이 없구나! 다른 이의 고통을 나누려고 하는 위대한 자비심!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하는 위대한 너그러움! 그대를 따르는 모든 사슴을 향한 위대한 친절과 부드러운 사랑! 일어나시오. 나의 왕국 안에서는 나는 물론이고 누구도 그대를 죽이 못한다는 법을 선포한다. 그리고 암사슴과 새끼 사슴도 함께.”

황금빛 사슴은 머리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만 사는 것입니까? 이 동산에 있는 우리의 친구이며 친척인 다른 사슴들은 어떻게 합니까?”

왕이 말했다. “지도자여, 그대의 청을 거절할 수 없구나. 이 동산에 있는 모든 사슴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겠노라.” “그렇다면 동산 밖에 사슴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슴들은 죽임을 당합니까?” 반얀이 물었다. “그렇지 않다. 나의 왕국 전체에 있는 모든 사슴을 살려주겠노라.” 황금빛 사슴은 여전히 머리를 들지 않고 간청했다.“사슴들은 안전하겠지만, 네 발 달린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됩니까?” “지금부터 나의 영토 안에서 그들도 역시 안전할 것이다.” “그러면 새들은 어떻게 됩니까? 새들도 살고 싶어 합니다.”

“새들도 사람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안전할 것이다.” “그러면 물 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됩니까?” “물고기도 자유롭게 살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베나레스 왕은 그의 국토 안에 있는 모든 동물을 죽이거나 사냥하는 것을 금지했다. 모든 동물의 생명을 위해 간청하고 나서, 위대한 존재는 일어났다.

…때가 되자, 반얀의 무리에 머무르던 새끼 밴 암사슴이 아기를 낳았다. 아기 사슴은 신들에게 바치는 연꽃처럼 아름다웠다. 아기 사슴이 젊은 수사슴으로 자라자 브랜취 사슴의 무리와 어울려 놀았다. 이것을 본 어미 사슴이 아들에게 말했다. “평범한 이와 함께 오래 살기보다는 위대한 자비의 존재와 함께 짧게 살다가 죽는 것이 더 낫단다.” 그 후에 아들 사슴은 사슴 왕 반얀의 무리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쿠루네고다 피야티싸, ‘지혜의 샘’, 불광출판사. 1994. 참조)



우리는 자따까의 사슴 왕 반얀의 이야기로 존엄성을 인정하고 확대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암사슴을 여성이라고 대입해 본다면, 존엄성을 갈망하는 존재이자 필요성을 느끼는 존재로 더 세밀하게 자각하고 있음을 보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존엄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이 느끼는 고통은,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겸애를 이해한 사슴 왕 반얀에 의해 쟁점화 된다. 인간사회 속에서도 권력이 가진 흐름은 존엄한 사회를 확대할 수도 있고 간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존엄성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을 확대한 사회가 어떠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가를 예견할 수 있는 스토리였다.



<젠더와 에이징,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

다시 인간에 대한 존엄으로 돌아가 보자. 존엄에 관련한 표층적인 논의이자 배려하는 대상과 배려를 받는 대상으로 여성과 노인은 근본적인 담론의 중심에 놓을 수 있다. 대체적으로 보살피는 역할은 여성이 하고 보살핌을 받는 대상은 노인이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성적인 본능을 가졌기에 남성보다 약한 존재로 각인될 수 있다. 그러한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남성의 보조적 역할이나 전유물로 권력의 핵심 밖에 있다. 인격으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사회와 시대도 있었다. 존엄성이란 개념에 빚지고 있는 페미니즘의 역사는 최근이 일이다. 여성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칸트주의는 페미니즘의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성 자체가 자신을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가족 안에서 수단으로 취급하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머니, 아내, 딸, 여동생, 누나의 존재가 남자와의 관계로 인해 규정된다. 예전에 여성은 결혼으로 인해 물물교환처럼 거래되기도 했다. 여성 자신이 투쟁의 역사 속에서 뛰어들어 인정과 분배와 대표로 중요한 역할을 획득하기까지 칸트주의는 목적론은 기여했다. 인간 존엄의 역사는 페미니즘 역사와 동등한 궤적을 가진다.

여성은 오래전부터 평등하게 대우받지 않았던 탓에서인지, 여성 자체가 가진 모성적인 본능 때문인지, 타인의 존엄함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남편(전혀 모르는 노인이나 환자도 가능하다)과 지내온 세월 동안 그를 알게 모르게 이해하고 그의 존재의 존엄함을 알고 있다. 남편이 늙고 아파서 누워있을 때도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안다.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는 모성적 본능이 여성에게는 자연스럽게 발동한다. 병들어 거동조차 어려운 사람을 목욕을 시키고 음식을 먹여준다. 타자의 고유한 성질을 훼손하지 않고 타자화 동일시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우선시한다. 자신의 존재성을 죽이고 타자를 위한 뜨거운 배려를 한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존재에게도 행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게 되지만, 희생을 감내해내는 존재는 ‘우아함’이라는 이름으로 ‘존엄’한 대상을 대우한다. 보살피는 여성은 윤리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취급될 때, 존엄성의 의미를 강하게 느낀다.

칸트가 윤리적인 측면으로 목적적인 인간애를 주장했다면, 쉘러는 존엄함을 알고 대상에게 실천하는 여성(보살피는 자)에게 ‘우아함’이란 칭호를 붙인다. 존엄에 대한 동서양의 깊은 논의들로 인해, 무한한 세계를 열어가는 존재자들을 다른 차원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는 존엄성을 인간 범위로 한정하기보다 확대하여 보기 원하며, 더 나아가 추상적인 개념 속으로 지평을 넓혀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연적이고 환경적인 다양성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존재, 동식물, 자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들 안에서 존엄성의 가치를 끄집어내는 작업은, 존엄성의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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