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논설위원/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요즘 대마도는 한국인 관광객이 발을 끊는 바람에 경제가 말이 아니다.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니, “no 제팬”에서 제외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 조선 조정에서는“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라는 영토개념에 근거하여, 대마도의 70% 식량을 책임지고 있었다. 툭하면 육지로 올라와 해적질을 해대는 왜구들의 본거지가 대마도이고 보니, 차라리 구호하는 국가시책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먹고 살 수 있게 숨통을 띠워주어야 한다는 인본주의에 뿌리가 닿아 있는 국정철학이기도 하였다.

대마도인과 왜구들은 복속(服屬)과 반역을 자주 오고갔으나, 조선의 국가시책인 ‘복속에 의한 통제정책’은 비교적 잘 작동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왜구들은 주로 명나라 연안을 노략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1918년(세종원년)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자, 왜구들이 명나라 해안을 꿀벌 드나들듯 하였다. 도둑놈 손버릇을 어찌하랴. 왜구들은 명나라로 가던 중, 조선의 비인(庇仁) · 해주(海州) 해안 지역에서 본색을 들어 낸 것이다. 당시 대마도는 종정성 (宗貞盛 : 도도웅와)가 새 도주가 되었는데, 조선정부는 도도웅아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태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두드리면 쏙 들어갔다가 금방 머리를 쳐드는 두더지 오락기 같은 왜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 왜구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명나라에서 첩보가 날아들었다. 조선을 거쳐 대마도 등지의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결단은 오히려 쉽고 단호해졌다. 명나라 군대의 뒤치다꺼리하다가 기둥뿌리가 뽑히기 전에 직접 왜구를 퇴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 징벌을 나서기 전“대마도는 본시우리 땅이다.(對馬島本是我國之地)”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종무의 군대가 대마도에 입성하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저희들의 배로 착각하는 바람에 첫 번째 입도공략(入島攻略)은 아주 쉽게 성공하였다. 이 때 이종무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그 첫 번째가 왜구와 주민들의 소유를 구분하지 않고 배와 집을 불태워 조선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공세를 취하지 않고 상륙부대를 제비뽑기로 선정하였으며 이 돌격부대가 위태로워졌다는 연락을 받고도 군선에 남아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이다. 이 때문에 박실 장군과 적지 않은 군사들이 죽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종무 군대는 10일 만에 소정의 전과를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환대는 잠시 뿐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상륙부대 제비뽑기’가 탄핵 사유가 된 것이다. 그는 귀양길에 올랐다. 이종무에게 있어 대마도는 눈물의 섬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은 그를 구명해 주었다.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의 왕위 옹립에 공헌했던 공신인 까닭이었다.

이종무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정벌은 나름대로 그 성과가 입증된다. 대마도주 도도웅와는 조선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며 신하되기를 자청하였다.

고려의 진봉(進奉)관계에 의해 종속되었던 대마도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과 일본 내부정세로 인해 왜구로 많이 변질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선의 영토보호책에 의거하여 다시 조선의 정치와 외교질서에 편제되어, 대마도는 우리 땅이 된 것이다. 대마도에 놀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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