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재일조선인 교육의 특이성

전후 일본의 외국인학교의 위치를 살펴볼 때는 아무래도 안보체제의 기능을 축으로 해서 보는 시점이 필요한데, 재일조선인 교육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조국 분단이라는 현실이 투영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조국의 분단은 그 각 정부의 교육방침을 기초로 하는 두 종류의 학교 설립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학교에 재학해 있는 조선인 자녀의 민족학교 전학을 주저케 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또 일본 정부도 북한에 대해 계속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쪽 학교만을 계속 박해하여 차별적인 처우를 시도하였다.

확실히 일본에서 외국인 자녀의 교육문제는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를 축으로 해서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고, 나아가 정치 문제화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재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일조선인은 그 수가 60만이고, 그 중 학령아동이 15만이라고 하지만, 이 중3할은 소위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일본에 연행된 노장년층이고, 나머지 7할이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소위 ‘반일본인’ 청소년층이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일본 정부의 봉쇄된 정책에 의해서, 전후 25년간 조국 왕래를 허가받지 못한 채 일본에 갇혀서 살았다. 앞으로도 이는 계속될 것이다. 일본어 가운데서 성장하여 조선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젊은 재일조선인 세대는 계속 확산 일로에 있었다. 독립된 조국이 있더라도, 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마음이 그것과 연결되어 독립하지 못하고 일본에 매몰=예속된 채로는 곤란하게 살고 있다.

이리하여 잃어버린 민족혼 되찾기를 원점으로 삼아 재일조선인의 자주적 교육이 성립하였다. 이 점에서, 본국에서 자라 일본에는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다른 외국인학교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와 동시에 조국 분단이라는 상황이 일본에서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현실도 다른 외국인학교와 동렬에 놓고 볼 수 없게 한다. 재일조선인의 교육을 볼 때는, 북한의 교육방침을 기초로 한 조선인학교(150교)와 남한의 지도하에 있는 한국학원(3개)으로 나뉘지 않을 수 없다.

재일중국인 자녀의 교육도, 예를 들면 요코하마에는 요코하마(橫浜) 야마테(山手)중화학교와 요코하마 중화중학(대만계)으로 나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살고 있는 동일 민족의 자녀가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된 교육을 받는다는 비참한 실정을 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학교는 분단에 속박되어 조선인학교와 한국학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심도 있게 추진한다는 점에서는 조선인학교와 한국학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심도 있게 추진한다는 점에서는 조선인 학교 쪽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교육내용 상 조선의 언어․문화․역사를 철저하게 가르치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각과 능력을 구축하고 있고, 학교 체계가 소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정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탁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에서 소학교부터 대학까지의 학교 체계를 만들어 낸 학교는 오직 재일조선인뿐이며, 이는 세계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다. 여기에는 북한이 제공하는 100억 엔 이상에 달하는 교육자금의 원조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1967년 이래). 그만큼 재일조선인과 그 조국이 민족교육에 쏟고 있는 마음 씀씀이는 마음을 찡하게 하는 바가 있다(고 오자와유사쿠선생의 견해).

이러한 재일조선인의 교육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에 의한 압박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조선은 민족학교를 양쪽으로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많은 자녀들이 일본인학교에 다니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이는 전후에 재일조선인 청소년의 교육 코스가 복잡하게 분화되고 있다는 우려할 만한 새로운 상황을 수반하였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자녀는 외국인(조선인)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교육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 취학자 15만 명 중에서 일본인학교 재학자 11만 명, 조선인학교 재학자 4만 명, 한국학원 재학자 2천 명의 비율로 되어 있다(1970년대). 게다가 재일조선인 자녀가 재일외국인 자녀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사실을 아울러 생각하면,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문제는 양적으로도 최대의 문제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는 외국인학교에 다닐 경우에는 민족교육을 보장받는 데 비해 일본인 학교에 취학할 경우에는 민족교육을 부정당하고 ‘일본인화’=동화교육이 추진되고 있다는 질적인 문제이다.

결국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가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은 조선의 언어․문화․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조선인학교 설립 목적).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열등감을 품고 계속적으로 살아가도록 강화시가는 점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열등감을 토대로 해서, 조선인으로서 재생하기보다 일본인에 동화하는 길을 선택하기 쉽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학교와 교사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권리를 매일 유린하고 있는 존재로서 직접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외국인 자녀의 교육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일본의 교육 현장과 깊이 교차되는 문제로서 일상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이 전후 일본에서의 외국인 교육의 상황을 개관해 보면, 재일조선인 측이 새로운 교육 관계의 창조를 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전전(戰’前)‘의 체질을 온존시키고 전후의 정치 상황에 입각하여 현상적으로는 오히려 그것을 계속 활성화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교육 정책의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는 전후 교육의 재건 기에 일시 교육의 비군사화 정책을 취하였으나, 패전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 책임을 의식한 적은 없었다.



5. 재일조선인 대학생과 문부성



반세기 이상에 걸쳐서 대략 수천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의 대학에 계속 재학하였다. 일본인도 또한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겨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일조선인 대학생의 법제적인 위치나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의외로 간과해 버리고 모른 채 지내온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일본인의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의 인식에 맹점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번에 그 문제를 조사해 보고는 깜작 놀랐다. 예를 들면 재일조선인 학생은 전전과 전후에 걸쳐서 유학생 신분도 일본인 학생의 신분도 아니고, 외국인 학생이라는 모호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학생은 그때그때 정부나 대학의 편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외국인으로 취급받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일본인으로 마음대로 취급당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재일조선인 대학생에 대한 문부성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서 전전에서 전후까지 변치 않았던 실질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전(태평양전쟁 전) 조선인 학생의 상황

메이지시대 초‧중기 즉, 구한말 당시, 조선 정부는 한국의 황제 유학생제도, 이어 학부 소관「일본 유학생 규정」을 만들어 계속 소수의 조선인 학생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들은 정식 유학생 신분이었다. 일본에 온 아시아인 유학생 중에서는 조선인이 가장 먼저였고, 중국과 베트남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식민지화되자 그 사정은 달라졌다.

먼저 일본으로 유학하는 조선인 청년이 급증했다. 당시 중학교 재학자 이상의 유학생 추이는 다음 표와 같다.



<표> 재일조선인 유학생 추이



유학이라는 이유는 조선 국내에 고등교육기관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조선보다는 지배국인 일본이 상대적으로 학문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고학으로도 공부할 여지가 있는 곳이라는 등등이 여러 가지 이유였다.

이러한 조선인 유학생의 증가 속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노동자가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것과는 달리 조선 전국에서 유학생이 나온 것, 도쿄에 집중한 점, 그리고 사립대학·고전(高專), 중학교 재학자가 다수인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때에 빠뜨릴 수 없는 점은 이들 조선인 학생의 다수는 주어진 법제적 위치와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유학생으로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조선인으로서의 주체를 견지하는 자세, 혹은 기백이 엿보였다.

전전의 재일조선인 학생사를 관통하는 이 하나의 강렬한 고리는 조선인 학생으로서 단결하여 민족독립투쟁을 계속 전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특히 1919년 2월 「2․8 독립선언」이래, 때로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결되면서도 조선인 학생의 과제로서 민족해방의 기치를 내린 적이 없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처음에는 ‘도쿄조선인유학생학우회’(1912년 결성)였고, 이 단체가 해산(1931년)된 후에는 각 학교 단위로 조직된 조선인 학생단체였다. 예를 들면 1942년 당시 조차 그 단체 수는 72, 조직 인원은 9,222명을 헤아렸다. 따라서 치안 당국은 이와 같이 단결하는 조선인 학생을 ‘사상운동의 선봉’으로서 위험시 하여 그 탄압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재일조선인 학생은 단지 조선인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치안 당국의 감시 하에 놓여 있었고, 조선총독부의 감독도 받아야 했다. 한때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관비 유학생’이 얼마간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조선인 학생은 대부분 ‘사비 유학생’이었다. 사비 유학생으로 자칭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본인 학생과 동일하게 시험을 본 후 입학‧전학하였고, 그 점에서는 일본인 학생으로 취급되었다. 단 자신이 사는 주거 상황을 신고하고,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는다는 의미에서는 조선인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 감독기관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생감독부(1911), 동양협회 조선 학생 독학부(督學部: 1919), 조선교육회 장학부(1911)로 변화되었지만, 그들의 통제 하에 학생들이 속박되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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