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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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상유십이척 미신불사(尙有十二隻 微臣不死).

코로나19 확진자가 6000명에 이른다는 발표를 들으면서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다.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臣)은 죽지 않았습니다.”

23전 23승의 무패 신화를 만든 불굴의 장군.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웠음에도 정치적 무고로 파직이 되고, 고문 옥고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시 부름을 받은 장군. 이 글은 그가 전쟁터 현장에 도착해 조정에 올린 글이다.

그가 누구인가.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역사를 남긴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이 마주한 싸움터는 처참했다. 원균은 죽었고, 전투는 패해서 밀리고 있었고, 수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다.” 열 두 척 ‘밖에’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열 두 척‘이나’ 남아있다고. ‘밖에’와 ‘이나’의 차이. 그것은 바로 ‘절망’과 ‘희망’의 차이였다. 그는 12척 배로 133척의 적을 이겼다. 가히 신화라 할 수 있는 이 해전이 오래도록 칭송받는 것은,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희망으로 바꿔 승리를 한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겼다.

공장의 불이 꺼지고, 상점들의 문을 닫히고, 거리가 텅 비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경제손실 예측도 벌써 조단위를 넘었다. 앞으로 전망도 빨간불이다. 게다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외국들이 한국을 ‘코로나의 온상’으로 여기듯 앞다퉈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한다고 발표하는 일이다. 그런 나라들이 드디어 96개국이나 되었다. 허브공항임을 자랑하던 인천공항엔 갈 곳을 잃은 국적기들이 발이 묶여 세워져 있고, 외국비행기들은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보다 더한 일이 있을까. 그동안 경제발전으로, K-POP으로, 한류문화로 올려놓은 국격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였는데....글로벌 시민권·영주권 자문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조사한 헨리 여권 지수에 따르면 지난 해 대한민국 여권은 세계 2위였다. 이 지수는 세계 200개국을 대상으로 해당국 여권으로 여행할 수 있는 나라 수가 많은 순서대로 순위를 매긴 것으로, 대한민국 여권만 있으면 무비자(혹은 도착비자)로 188개 나라를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입국거부와 격리를 넘어 항공기마저 착륙하지 못하게 하는 초유의 거부사태라니, 국가적 고립이 실감이 난다. 여행은 안가면 된다지만, 그 많은 기업들의 주재원과 사업가들의 발이 막히게 되니 이를 어쩔 것인가.

고립이 커지면서 정부의 외교정책 무능에 화가 나지만, 국민들은 그저 사태가 빨리 진정되길,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만 기도하며 자발적 격리로 ‘손씻기’와 ‘귀하신 마스크’에 목숨을 걸 뿐이다.

이럴 때 ‘상유십이척’을 생각해 본다. 우리의 핏 속으로 전해져 오는 DNA는 일제 강점을 이겨낸 독립정신과 불굴의 의지다. 우리는 지금의 사태를 얼마든지 희망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반성해 보자. 그동안 우리가 너무 거품 속에서 산 것은 아닌가. 여권 지수 세계 2위가 자랑스러운 만큼, 해외여행이 너무 많았고 씀씀이가 컸던 것은 아니었는가. TV 프로그램들은 외국을 마치 이웃집처럼 여기도록 세뇌시켰고, 모두 외국가기를 이웃도시 가듯 가볍게 갔다. 관광지는 어떤가. 휴가철에 해외로 나가게 한 것이 너무 비싼 식대와 숙박비 때문은 아닌지? 도시의 아파트 값은? 그리고 턱없이 비싼 임대료는? 또 프랜차이즈 비용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은 사회적 비용은 우리사회를 겉은 화려하지만 허약한 사회로 만들었다. 저축을 하고 절약을 하던 근검정신을 잃은지도 오래다.

코로나19로 잃은 것도 많지만, 이를 계기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보자. 이 기회에 더 위생적인 생활이 몸에 배게 하고, 함께 먹는 우리 음식 습관도 바꿔보자. 결혼식과 장례식 등은 소규모 가족행사로 바꾸고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을 버리자.

나라의 위기에 이순신 장군이 불과 12척의 배로 왜적을 이겨냈듯, 국민 모두가 마음을 다잡고 힘을 모으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곧 다시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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