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 주간)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6월 18일(화) 오전 9시 33분

일찍 일어나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운동부족이 쌓여갈 뿐이다. 오늘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아주 나쁘니까 될수록 외출을 삼가라는 보도가 있다. 방안에만 갇혀 있으면서 장 활동을 추진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해보고 있지만, 모두 새벽 걷기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오래 살면서 겪게 되는 나만의 병고는 배변장애와 배뇨장애다. 한두 가지 탈나는 데가 없는 노년은 없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다른 데가 아픈 것도 괴롭겠지만, 배설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당해보지 않으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6월 19일(수) 오전 9시 55분

나이 들면 무엇보다도 가족이나 친지 또는 남에게 노년의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씀이 절실하게 된다. 특히 몸이나 마음에 병이 생겨 여러모로 폐해를 끼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병들고 자기관리가 어렵게 되기 전에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기본조건인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건강을 잘 유지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선 매일 삼식부터 신경 쓰게 된다.

지난 2년 동안 일본과 한국에서 보고 듣고 실험해본 결과 현재의 상태에서 가능한 식단을 정리해 본다. 아침은 대체로 오전 4시 전후에 기상하면 즉시 소금물로 양치하고 나서 바로 온수(+레몬즙) 한 컵은 천천히 마신다. 한 시간 후에 계피‧ 생강‧ 코코아‧ 레몬‧ 올리고당을 섞어서 만든 차 한 컵을 마신다. 그리고 30분 후에 유산균 한 알. 다시 30분 후에 잡곡식빵 반 개 + 치즈 + 생강꿀홍차 한잔. 여기까지는 장 기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일양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른 식단이다. 점심은 만나는 사람이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좋아하는 것으로 식사하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주력한다. 과식과 편식을 극력 피한다. 저녁은 아주 가볍고 소화 잘 되는 음식을 오후 5시에서 5:30 사이에 마치고 위를 완전히 비우고 나서 8시에서 9시 사이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원칙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리고 매 식사30분전과 식사 후 1시간에서 2시간 사이에 온수 한 컵을 마신다. 하루에 30분정도 걷기를 계속 해왔다. 이렇게 해오는 가운데 배변장애와 배뇨장애가 조금씩 천천히 개선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잘못된 식사와 운동부족으로 말미암은 신체적 적폐청산이 인내와 신중을 요하는 긴 과정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또 단단히 각오한 바이기 때문에 노년기의 인생공부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젊을 때 소홀히 했던 삶의 깊은 뜻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귀한 체험을 겪게도 된 것을 감사하는 나날이다.



6월 20일(목) 오후 6시 29분

일일 삼식을 간편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챙기는 일은 현명한 몸돌보기의 기본이다. 그러나 몸돌보기는 마음 닦기와 함께 꾸준히 이어질 때만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이 들고 나서야 뒤늦게 몸으로 체험하게 된 깨달음이다. 식사를 끝내고나서 걷는다.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가 나쁘지 않는 날은 집밖에서, 그리고 공기의 질이 나쁘니까 외출을 삼가라는 일기예보가 있을 때는 할 수 없이 집안에서─다행히 2층집이라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그리고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걷는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반성하고 판단하고 상상하고 계획한다. 30분에서 60분사이의 생각하는 걷기를 끝내고 나면 나이든 몸이라 노곤해서 잠시 동안 무념무상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하려 해서가 아니라 제절로 살며시 눈을 감고 앉은 채로 졸게 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10분에서 30분정도 지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상쾌해서 자연히 책을 읽고 싶게 된다. 삼시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 오전 오후의 일정한 시간─평균 오전 2시간 오후3시간─ 독서에 몰두한다. 잡념 없이 정신을 집중해서. 그러고 나서는 머리를 완전히 비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않으면─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계속 실행하고 있다. 이것은 열심히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섭취하되 그것에 구애, 구속,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이라─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경지─ 거기서만 가능한 삶의 지혜를 체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서는 정보나 지식을 획득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목적달성을 이루는 일 보다 수양과 양생을 통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자기와 이웃과 나라와 누리열기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바람이요 보람이기 때문이다.



6월 21일(금) 오후 10시 33분

젊어서는 채우는 맛이 더 없는 쾌락이었으나 나이 들어서는 비우는 맛이 더 없는 지락(至樂)인 것을 절감한다.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못하는 것은 아프고 괴롭고 아주 불편한 병고다.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배설장애라고도 하고 변비라고도 한다. 배뇨장애라고도 한다.

그런데 신체적 변비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서 완화, 치유, 회복하게 되지만 정신적 변비는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기 때문에 방치하기 쉽고 그래서 그것이 고질이 되어, 마침내 근원적 생명력을 고갈시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히 치명적이다.

젊어서는 눈을 부릅뜨고 밖의 빛을 찾아 헤매지만 나이 들어서는 눈을 지긋이 감고 안의 빛을 찾아 삶의 깊은 맛을 즐긴다. 밖으로부터의 빛이 밝혀주는 것은 밖으로 펼쳐진 세계이고 안으로부터의 빛이 밝혀주는 것은 내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밖의 세상을 알고 그것을 자기 뜻에 따라 바꾸어 보려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안의 세계를 깨닫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바라고 원한다. 태어난다는 것은 밖으로 나와서 그것을 자기에 맞게 바꾸어 나가는 젊은 시절을 살다가 나이 들어 마침내 죽게 될 때는 거기서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밖으로 나가는 것과 안으로 돌아오는 것의 반복이요 언젠가 안으로 돌아와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지게 되면 그것이 다름 아닌 죽음이다. 당사자가 아닌 남들이 보면 밖으로 나와서 늘 보고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기 때문에 그가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6월 22일(토) 오전 10시 1분

여러 해 전에 내가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느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옛 성인이신 공자께서 앎을 쌓은 사람은 물을 즐기는데 덕을 쌓은 사람은 산을 즐기고, 앎을 더해가는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덕을 더해가는 사람은 고요하고 평안한 곳에 머물며, 앎을 이룬 사람은 삶을 즐기는데 덕을 이룬 사람은 삶을 오래 누린다고 말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의 내 나이가 70대 후반이었다고 추정되는데, 공자가 70대에 이르면 자기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해도 결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된다고 말했는데 비슷한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끝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는 사람─知者 도 仁者도 아닌 探者─ 이라고 여기고 물도 산도 아닌 바람을 즐기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그렇다고 고요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는 것도 아닌 자유로운 노닒 – 動도 아니고도 静도 아닌 遊─을 이어갈 뿐이며 그래서 주어진 삶을 즐기는 것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삶의 새로운 차원, 지평, 경계를 열어갈 따름이라고.

다른 학생이 질문을 계속했다. 찾고 또 찾는다는데 도대체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삶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정지 될 수 없는 새밝─개신─개벽의 나사선운동과정(Spiral Movement)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보다 뜻있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찾고 또 찾는 것이다. 삶이란 살아있고 살아가는 동안 최종적인 결론이 없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늘 낯선 미지의 전개에 새롭게 대면, 대응, 대결하면서 때로는 불안과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경험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체감, 체험,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이란 물음만 있고 정해진 정답이 없는 기한부과정이다. 그저 끝까지 나름대로의 잠정적인 가설적 관점과 입장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젊어서는 젊음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나이 듦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다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젊어서는 앎이 더해가는 과정이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깨달음이 깊어지는 나날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또 다른 학생이 물어왔다. 앎과 깨달음은 어떻게 다르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앎이란 나의 밖에 있으면서 내게 맞서 있는 것들을—사람이든 물건이든 사건이든— 파악하고 인식하고 정리하는 일이지만 깨달음이란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과 얼을 갈고 닦는 일이며 거기서 삶의 참뜻을 체감‧ 체험‧ 체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나 자신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는 앎에 치중했는데 나이 들어서는 깨달음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6월 23일(일) 오후 10시 6분

젊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 보니까 소위 노인이나 노년 또는 고령자에 관한 논의나 주장이나 정책이나 시책이 온통 중장년─40/50/60대─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노년─70/ 80/ 90대─의 체감, 체험, 체인과 어긋나고 부딪히고 빗나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요, 거기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중장년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일방적으로 노년에게 강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병리적 부적응현상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노숙년의 독자적인 삶의 뜻과 보람과 바램이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마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생기는 고통과 비애와 낙담과 실망에 대해서 무감각‧ 무관심‧ 무반응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죽게 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도 청소년기와 중장년기와 노숙년기를 겪게 된다. 어느 시기가 다른 시기보다 더 중요하지도 않고 어느 시기가 다른 시기에 비해서 그 가치와 의미가 덜하지도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백인 남성 중장년 세대 중심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다른 세대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20세기말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21세기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인종 간, 남녀 간, 세대 간의 상호존중, 상호화해, 상호행복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사회의 실상은 인종 간, 남녀 간 그리고 특히 세대 간의 갈등, 대립, 분열이 너무나 심해서 가정‧ 사회‧ 국가 내부붕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6월 24일(월) 오후 10시 50분

요즘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사회적 가치는 생산성과 효율성과 자립성이다. 그래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고 타자 의존적 일수밖에 없는 노년세대가 경시, 홀시, 무시당하게 된 것이다. 일부 노년층의 사람들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처럼 청소년세대나 중장년 세대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다고 칼로 나무 자르듯이 단언할 수만은 없다. 근대화-산업화-공업화-합리화-경제중심화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의식이 편향되고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의식이나 성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협소해져서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런 사회적인 인식과 추세에 따라서 나이 들어도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사회심리적 압력이 아주 강하게 일상의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산성, 효율성, 자립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사회경제적 약자들─ 잔인한 현대사회의 실상이다. 이것은 나이 들어 병약해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회(The good society)가 반드시 생산성과 효율성과 자립성이 고도로 실현된 사회만일까? 그것은 젊고 건강하고 풍요가 갖추어진 사람들만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사회일 뿐이다. 다양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런 상황에 이르지 못하고 거기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젊고 나이 들고를 막론하고─ 미래가 없는 지옥일 뿐이다. 일부의 운 좋고 혜택을 누리는 소수에게는 천국일지 몰라도.

모두가 함께 고루 잘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러나 그런 사회는 정부가 권력의 힘을 빌려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지시, 명령, 강제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간섭이나 억압 없이 펼쳐지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적정한 수준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이 베풀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갖추어져 있는 사회가 최소한의 기본조건이 아닐까? 쓸데없이 귀중한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력이 너무 간섭적‧ 개입적‧ 통제적이지 않아야 된다. 될수록 작은 정부가 좋다.

나이든 사람도 숨 쉬고 살자.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그들에게 희망이 실감될 수 있고 절망과 비관 속에서 매일을 억지로 살아가는 많은 나이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치고 서로 돕고 잘 어울리는 가운데서 보다 좋은 사회를—참으로 좋은 사회─ 함께 만들어 가는데 언제까지나 수동적으로만 대처하지 말고 우리 나이든 세대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이 죽게 될 날이 멀지 않다면 얼마 남지 않은, 그러나 귀중한 나날을 다음세대가 우리 세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남은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노인철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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