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선 충북도특수교육원 특수교육과장

김태선 충북도특수교육원 교육과장

[동양일보]“Don’t run! (뛰지 마)” 저 멀리서 누군가 우리 쪽을 보고 소리쳤다. ‘음? 뭔 소리지?’ 경치가 빼어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피크닉 장소에서, 초등학생 딸, 유치원생 아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교실 두 칸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있는 거대한 야생곰과 눈이 딱 마주쳤다. 믿어지지 않았다. 자지러지게 놀라 눈앞이 까매져 왔다. 천천히 앞발을 내려놓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얼마나 가까운지 곰의 발달한 옆구리 근육이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것도 눈에 보였다.

그 순간 후회가 밀려오며, 여기 오기까지 겪은 일이 생각났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들어오며 승용차 입장료를 낼 때 옆에 붙어있던 야생곰 주의 문구가 생각났다. 설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까지 야생곰이 나타나겠어? 내가 무시하고 지나쳤던 야생곰을 주의하라는 경고가 생각났다. 어디에서 점심 먹을까?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장소를 찾을 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식사할 수 있는 좋은 피크닉 장소가 나타나서 감탄하며 차를 주차했었다. 식사할 준비를 하느라 트렁크를 여는 동안 먼저 피크닉 장소에 갔던 딸이 되돌아오면서 말했었다. “엄마. 저기 미국인들이 그러는데 여기 곰이 나타난 적이 있는 곳이래요. 다른 곳에 갈까?” 잠깐 미국에 살면서 은근한 인종차별을 겪은 터라, 동양인 싫어서 그러나 보지 하고 생각하며 또 경고를 무시하고 믿지 않은 것도 후회가 되었다. 김치를 먹을 때 냄새를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미국인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하필 우리 쪽으로 곰이 접근하다니...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말도 안 되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원망도 밀려왔다.

옆에서 김치를 밥에 얹어 막 입으로 가져가던 딸이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라고 소곤거렸다. 순간 여자가 아닌 엄마의 입장에 서게 되며 정신이 돌아왔다. “얘들아, 천천히 일어나서 뒷걸음질로 가서 자동차에 타. 곰을 자극하면 안 되니까 절대 소리 지르거나 울지 말고. 천천히.” 다행히 평상시에는 재잘거리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던 아이들이 조용히 일어나 뒷걸음질을 치며 자동차에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데도 벌써 교실 반 칸 크기를 더 좁혀와 있는 곰과 계속 시선을 놓치지 않고 마주 보면서, 펼쳐놨던 밥과 찬을 큰 아이스박스에 마구 집어넣고 일어섰다. 남편과 나는 각각 아이스박스 손잡이를 한쪽씩 잡고 야생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손에서 땀이 흘러나와 아이스박스 손잡이가 미끄럽게 느껴지고, 곰의 걸음걸이는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뒤로 움직이는 속도보다 곰이 움직이는 속도가 빠른지, 어느새 교실 한 칸 크기의 거리만큼 곰이 다가와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더 초조했는가 보다. 아니면 나보다 보폭이 더 커서 그런가? 어느새 남편의 뒷걸음치는 속도와 내 뒷걸음치는 속도가 달라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뒤틀리고 있었다. 조바심을 치며 뒷걸음질을 하는 발끝에 툭! 하고 차 뒷부분이 걸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평상시처럼 행동하고 느끼려고 노력하면서 열려있는 트렁크에 아이스박스를 넣었다. 계속 따라오던 곰이 우리가 점심을 먹던 장소에 서더니 다행히 미처 못 담고 온 음식물을 집어 먹으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승용차에 얼른 올라탔다. 그런데 이 곰이 집어 먹어보던 음식물이 별로인가보다. 다시 어슬렁거리며 우리 승용차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머리끝이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주차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미국인이 경적을 크게 울렸다. 그러자 곰이 깜짝 놀라며 급히 방향을 바꾸어 다른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도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같이 경적을 울렸다. 살아났다는 실감이 나며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나갔기 때문에, 혹시 별로 위험하지 않았던 것을 괜히 눌렀었나 하는 생각도 들 무렵이었다. 야생곰 사육장을 견학할 일이 있었는데, 트럭에 먹이를 싣고 다니며 사육사가 삽으로 먹이를 던져줄 때마다 곰들이 그 먹이를 먼저 먹기 위해 다투어 달려오는 속도를 보게 되었다. 세상에, 단거리 육상선수보다 빠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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