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1231년 시작된 몽골제국의 고려 침공은 1259년 몽골에게 완강하게 저항하던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막을 내린다. 다음 해인 1260년 몽골제국의 5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대한 무력강압의 정책을 회유책으로 슬그머니 바꾼다.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함 구축을 위해서는 고려 장인들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다.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쿠빌라이 칸은 이미 일본에 병사까지 파견한 사실까지 있었는데, 1265년 몽골의 고려출신 관리 조(趙)이가 부채질하는 바람에 일본 정복의 야망이 더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허풍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일본은 동방의 섬으로, 대양의 가운데에 있다. 대륙으로부터 1,500마일 떨어진 커다란 섬으로, 주민은 피부색이 하얗고 예의가 바르다. 또 우상숭배자이다. 섬에서는 금이 발견되는데, 그들은 무제한으로 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대륙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섬으로 향하는 상인은 거의 없어, 이 때문에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금이 넘쳐나고 있다. 이 섬의 군주의 궁전에 관해서, 나는 한 가지 놀랄만한 것을 말해두겠다. 마치 우리 기독교 나라의 교회가 납으로 지붕을 덮고 있는 것처럼, 지붕은 전부 순금으로 덮여있는데, 그 가치는 거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마루도 약 4cm 두께의 금으로 만든 판이 전면적으로 깔려 있고, 창문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궁전 전체적으로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부를 형성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일본이 금으로 된 지붕을 덮고 사는 풍요로운 나라라는 얘기를 듣고 일본에게 신하가 되라고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몽골은 해군의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남송을 칠 때, 일본이 근심이 될 것을 우려하였다. 일본을 칠 때, 고려가 근심이 되었기에 고려를 수중에 틀어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려가 군선을 다 제조하면「남송이 됐든, 일본이 됐든, 명령에 거역하면 정벌하라」고 자신의 뜻을 군기처럼 세워두었다.

쿠빌라이는 1266년 고려의 관리들을 몽고 사절과 함께 배를 태워 일본으로 보냈다. 고려 관리의 머릿속으로 일본 침공에 따른 경비를 고려가 부담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대한해협의 높은 파도보다 강하게 밀고 들었다. 대마도가 가까워질수록 풍랑이 거칠어졌다. 파도를 가리키며 고려 관리는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과 일본인은 성격이 난폭하고 예절을 모르니 일본진출은 이득이 없다고 설득하였다. 풍랑에 익숙하지 못한 몽골사절도 고개를 끄덕이며 뱃머리를 돌리자 하였다.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는“풍랑의 거칠고 험함을 이유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도록 하라”소리 지르며 고려의 원종에게 국서를 직접 일본에 전하라고 하였다. 이어 원종은“성은은 하늘만큼 커서, 맹세코 공을 세워서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고 충성을 맹약한 후 사절단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분노하면서 고려가 스스로 책임사절을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1268년 정월, 고려의 사절단이 다자이후에 도착하였다. 국서에 답을 얻지 못하고 고려 사절단은 7개월 만에 고려로 귀환하였고, 통교에 실패하였다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하였다.

1269년 2월, 쿠빌라이 사절단 75명 대마도에 상륙하였다. 일본 무사들이 공격해 왔다. 겨우 2명의 대마인을 붙잡아 귀국하였다. 1269년 9월 중서성첩을 보냈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1271년 9월 몽골제국으로의 복속을 명령하는 국서를 지니고, 조양필이 100여명의 사절단을 끌고 일본으로 갔으나 소용없었다. 1272년 조양필은 연달아 헛걸음질을 하였다. 일본은 끝내 무릎을 땅에 대지 않았다. 삼별초와 남송도 암암리에 힘을 보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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