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가족만 대리구매 가능…임산부·노약자 등 사각지대 대리구매 범위 확대·주민센터 ‘찾아가는 서비스’ 등 필요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 청주의 한 요양보호센터에서 일하는 A(44)씨는 12일 거동이 불편한 치매 노인들의 마스크를 대신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섰다가 헛걸음만 했다. 그는 장기요양보호수급 인증서와 노인들의 신분증 등을 가져갔지만 가족관계이거나 동거인이 아니어서 구입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몸을 돌려야 했다. A씨는 “치매 노인들이 장시간 줄을 서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이들까지 배려하는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신 7개월차인 B(여·36)씨도 마스크 구매를 위해 아침부터 청주시 상당구의 한 약국 앞에 줄을 섰다. B씨는 “몸이 힘들지만 마스크를 안 쓸 순 없으니 직접 발품을 팔아 구매할 수밖에 없지 않냐”며 “줄을 서기 힘든 임산부나 환자까지 대리구매 범위를 조정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마스크 대란으로 9일부터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됐으나 거동이 불편하고 정보접근성이 낮은 소외계층의 불편은 두드러지고 있다. 임산부와 외국인 유학생 등 마스크 대리구매 대상에서 배제된 이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선착순 판매가 이뤄지면서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해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가 하면, 원정 구매나 가족 모두를 동반한 구매자도 속출, 취약계층은 뒤로 내몰리고 있다. 면역력이 약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 장애인, 독거 노인 등 취약계층이 마스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2010년 이후 출생한 어린이와 1940년 이전 출생한 자녀들과 동거하지 않는 노인에게는 대리구매가 허용되고 있으나, 사실상 대리구매 혜택은 받지 못한다. 통계상 60세 이상의 인구 70%가 자녀와 따로 살고, 고령일수록 자녀가 독립한 비율이 높은데도 동거가족을 통해서만 대리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일부터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약국 등 공적판매처의 마스크 수량을 체크할 수 있도록 개선됐으나, 모바일 환경에 익숙지 않은 고령자 등은 정보 공개의 수혜를 누리기 어렵다. 대리구매의 대상에서 벗어난 초등학생 어린이의 부모나 임산부들의 불만도 이어지고 있다.

정작 감염위험성은 늦고, 주머니 사정은 넉넉한 청·장년층이 공적마스크를 훨씬 쉽게 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적마스크 판매가 오히려 지원이 필요한 계층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공적마스크 구매 사각지대에 있다. 외국인이 공적마스크를 사려면 외국인등록증과 함께 건강보험 서류가 필요한데, 국민건강보험 의무가입 대상이 아닌 외국인 유학생은 단체보험이나 민간보험에만 가입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건강보험증이 없다.

정부가 생산량의 80%를 조달청을 통해 일괄 구입하는 상황에서 공적마스크 외의 보건용 마스크가 장당 평균 4000원 선에서 팔리고 있어 공적마스크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지원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마스크 대리구매 대상을 확대해 달라는 글이 10여건 올라와 있다.

전문가들은 줄을 설 수 없거나 마스크 구매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취약계층이 공적마스크를 더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높은 민간 유통망을 이용하거나 SNS 등 온라인을 이용한 예약·구매 제공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실제 우리와 비슷한 ‘마스크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대만의 경우 건강보험 앱 등을 이용한 온라인 예약 판매 서비스를 실시해 눈길을 끈다.

또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읍·면·동주민센터나 이·통·반장을 통한 찾아가는 서비스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충북 제천시나 음성군 등 일부 지자체에서 미리 확보한 마스크를 임산부나 노인 등에게 긴급 배부하고 있으나, 현재로선 지속하기 어려운 일회성 공급이다.

청주시 청원구의 김모 약사는 “요양병원에 있는 환자의 경우 요양보호사 등 자격을 갖춘 사람이 대리구매 할 수 있도록 보호자 범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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