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다큐 인사이트= 아이들의 학교중 캡쳐

 

[동양일보]●전전(태평양전쟁 전) 조선인 학생의 상황

전전의 재일조선인 학생에 대해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모습과 함께 고학생상일 것이다. 사실 일하면서 공부한 조선인의 체험은 수도 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한 예로써 다이쇼(大正) 말기의 상황을 보면, 도쿄 유학생 1,322명 중 567명이 고학생이고(1919), 그 때문에 수업료 미납으로 중퇴한 자도 많았다. 취직의 차별 하에서 신문배달이라든가 고물장수라든가 토목일이라든가 밑바닥의 육체노동으로 생활을 지탱하고 학비를 벌면서 공부하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좌절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끝까지 졸업한 학생이 더 많았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자,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학생 다음으로 강제로 군대에 지원해야 했다. 문부성은 지원하지 않은 학생은 퇴학시키겠다는 방향을 시달하고, 대학·고전(高專)의 학생부가 이를 권장하는 일을 맡았다. 그 결과 1943년 11월 마감일까지 약 2천 명의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강제 지원당하였다. 일본인 학생으로 취급함으로써 억압자 일본을 위해 죽으로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에 도쿄대학 학생부에 근무하고 있던 미쓰이 다메토모(三井爲友)는 군대 지원을 권장하기 위해 만난 한 조선인 학생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전하고 있다.

“나는 일본의 전선에서 혹사당하고 싶지 않다. 개죽음을 하고 싶지 않아, 민족독립을 위한 전쟁에 나아가서 죽고 싶은 거야. 나는 조선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
이는 동원된 2천 명의 조선인 학생의 공통된 심경은 아니었을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서 공부하는 자에게 학문을 버리고 원수 일본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큼 비통한 모순은 없었다.

KBS1 다큐 인사이트 = 아이들의 학교중
KBS1 다큐 인사이트= 아이들의 학교중 캡쳐

●전후 조선인 학생의 상황

재일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본 측의 자세는 전전과 전후사에 어떤 본질적인 차별성이 없지만, 조선인 학생의 주체적 상황은 크게 변모하였다. 그 두 가지를 지적해 둔다.

첫째는, 조선이 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 바뀜으로써 재일조선인 학생의 운동의 질이 반일제민족독립에서 외국 공민으로서의 활동으로 바뀌고, 재외 공민으로서의 조선인 학생의 단결과 그 입장에 입각하여 한일 학생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출입국관리법안’ 등이 제출되는 상황에서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권리를 지키는 활동이 불가결해졌지만,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독립국민의 권리 옹호는 역사적 과제의 질을 달리하였다.

둘째는 재일조선인 학생 자체가 그 주체의 질이 변모된 점이다. 전전의 경우에는 조선 본국에서 조선인으로 성장하여 먼저 그 민족적 주체성을 지닌 후, 일본어를 나중에 배우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그런데 전후가 되자,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일본어를 습득한 후에, 조선어를 나중에 배워 일본인으로 성장한 것을 반성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각과 성장을 달성해 나가는 형태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일본인으로 교육되어 버리고, 조선인으로서의 일본대학에 유학한다는 자세가 엷어지기 쉽다. 이에 재일조선인 학생단체는 그 활동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재일조선인 학생의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높이는 일이였다.

이상의 두 가지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역사적 변화의 기본을 지적한 데 지나지 않은 것으로, 실제로는 복잡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유형적으로 정리해 보면, 먼저 북한의 재외 고등교육기관인 조선대학교(도쿄 소재)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학생이 있다. 형식과 내실 모두 조선의 재외공민으로서 공부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가 적대적인 대상으로 주시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일본의 대학에 다니는 자가 있다.

수적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여기에는 재일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공부하고, 재일조선인 학생단체에 가입해 있는 자와 재일조선인임을 숨기고 일본인 이름으로 공부하고 있는 자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민족적 자각의 차이에 의한 것이지만, 의외로 후자 쪽이 그 숫자적으로는 훨씬 많다.

세 번째로, 극히 소수지만, 한국에서 온 유학생과 밀입국해서 공부하고 있는 자가 있다. 한 마디로 재일조선인 학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논리적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기대학부터 대학원까지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재일한국인 학생은 매년 거의 3000명 전후였고(1960년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대략적인 수치를 보면 1952년 2400명, 1962년 2900명, 1968년 3900명이고 이는 거의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소‧중‧고를 졸업해서, 일본인 학생과 동일하게 시험을 보고 입학한 학생이다.

외국인등록증을 가진 자는 일본인 학생과 구별 없이 동등‧동질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문부성과 대학의 방침에 따라 입학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들은 일본인 학생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부성은 유학생이나 일본인 학생과도 다른 ‘외국인 학생’이라는 범주로 설정하여 이들을 유학생에 대한 보호(유학생 후생시설이나 의료보장 등)에서도 배제시키고, 일본인 학생에 대한 보장(일본 육영회 장학금 등)에서도 제외시켜 아무런 제도적인 보장은 해주지 않고 있다. ‘외국인 학생’에 대해서는 분류상의 영역만 있을 뿐이고, 정책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대외적인 발표에서는 일본의 대학은 1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좋은 이미지를 심는데 이들을 이용하고 있었다(1970년 현재 유학생 4,300명, 외국인 학생 5,300명, 재일중국인 학생도 포함).

이처럼 일본인과 동일시 취급한다는 방침 하에 아무런 제도적 보장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는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권리를 지키고 그 학습의욕을 지탱해 주는 것은 분명 조국의 발전과 통일에의 염원을 간직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자각과 단결과 활동일 것이다.

일본이 패전 직후, 일찍이 ‘재일조선학생동맹’이 만들어져(1945.9.) ‘조선 문화의 건설에 노력’할 것을 목표로 활동했지만, 조국 분열을 배경으로 우파는 ‘재일한국학생동맹’(1950.5.)을 만들고, 좌파는 후에 이것을 ‘재일유학생동맹’으로 개편하고(1952.12.) ‘북한의 유학생’이라는 자각을 토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두 학생단체는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 여러 단체는 모두 재일조선인 유학생으로서의 자각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의 대학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활동을 벌이는 한편, 한문연(韓文硏) 혹은 조문연(朝文硏) 등의 동아리를 통해 일본인 학생들과 교류에 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조직하고 포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 매몰되어 이들 여러 단체와 유리된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학생도 여전히 많다. 그런데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대학에서 배운 전문적 지식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활용해 나갈 것인가 하는, ‘장’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념의 문제로서보다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적인 문제로서 심각한 것이었다. 이념적으로 조국의 발전에 일조한다고 뚜렷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실제 문제로 들어가 보면 조국으로 돌아가 활동한다거나 이를 위해 조선어에 통달하고 지금까지 몸에 배인 생활에서 벗어나는 정도까지는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배운 것을 일본 사회에서 살려보고 싶어도 취직의 차별 때문에 그럴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대학 졸업자들이 대학에서 습득한 것과 거의 관련이 없는 육체노동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극히 소수만이 일본에서 조국 발전을 위해 자신 특기를 살리고 있는데 불과하다.


끝으로 일본의 대학에서는 재일조선 학생들의 고교의 학력을 무시하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인 학교는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조선대학교는 의학을 비롯하여 주로 자연과학‧기술과학 시설이 매우 미비했다.

그래서 당연히 조선학교의 고교를 졸업생 중에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희망 학생이 나오면, 일단 조선학교의 고교를 졸업한 자는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극도로 제한 받게 되었다. 조선학교의 고교는 일본의 교육법 하에서는 각종학교이며, 각종학교 졸업생들에게는 대학 입학자격이 없기 때문이다(1953년 문부성은 이러한 취지의 통달을 냈다).

물론 조선인 학교를 적대시하는 일본 정부는 그 졸업생을 유학생으로서 받아들일 복안도 없었다. 겨우 오사카 외국어대학과 32개 사립대학이 대학의 책임 하에 조선학교 고교 졸업생에게도 입학자격을 인정하였기에 그 대학에 한해 일본인 학생과 동등하게 시험을 볼 수가 있을 뿐이였다. (현재는 보다 많이 완화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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