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사람들을 만나야 더 힘이 나오나 봐, 나는.

연배는 높고 한때 다른 학교에서 입사동기였던 S교수가 근황을 전해왔다. 일부러 시간 내 연락해오고, 때마다 어려운 일 물어봐서 기도해주마 격려해주는 고마운 이지만 사는 지역이 달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정년을 넘겨서도 강의를 해오다가 이번 학기부터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단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갇혀 지내면서 다소 힘이 빠지고 있다면서도 우리 남편은 혼자서도 잘 지내데. 사람을 만나야 에너지 얻는 이가 있고, 혼자도 충족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애. 집에서도 잘 보낼 방법을 더 찾아야겠어, 목소리는 유쾌했다. 논문 쓰고 강의안 만들고 얼마쯤은 의무로 책 보던 일에서 놓여난다고 넘치는 책들 정리해서 한결 가든해졌다는 살림 이야기도 했다. 화가 딸에게 수채화 그리기를 잠깐 배웠다더니 매일 성실하게 공부하듯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 일취월장하는 그림실력, 죽을 때까지 배우는 거라는 오래된 말씀이 스쳐가기도 한다.

S교수님은 자신이 작년에 치매초기 진단을 받았다고, 약을 먹으면 진행을 늦춘다고 하더라는 말도 일상 이야기처럼 전한다. 밥벌이의 어려움을 벗어나 편해질까 싶은데 모두가 두려워하는 병에 걸리다니, 아직 엄청 젊고 아름다우니 심란스러울 법도 한데 교수님은 약 먹는다고 아직 어떤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니라고 평화롭다. 마치 나 감기걸렸어, 한 일주일 푹 앓고 나면 나을 거야 하는 말로 들리도록.

S교수 어조에 불안이 탑재되지 않은 이유를 서로 나누었다. 목회자라는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 덕택이라고 해도 피하고 싶은 병에 문화적인 은유를 들이대지 않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노년의 질병은 노화나 노쇠가 아니라 삶에 대한 결산, 생애의 결론같은 이미지가 씌워지기도 하니. 무심히 하는 “죽을 때 보면 안다”는 표현은 죽음을 존재의 끝으로 전제한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이 되기도 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나 고치기 어려운 병일수록 중한 벌이 되기도 한다. 벌을 받아 태어나고 벌을 받아 죽는다면 삶은 잘못에 대한 보응의 기간이 될 터이다.

피하고 싶은 것들을 신의 형벌로 보는 한 어린 자식의 병이 부모의 잘못인가 자식의 잘못인가 하는 말이 안되는 물음까지 가능해진다. 병이라는 불가사의 앞에서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계속 판정하면서 병과 병자에 대한 기피와 혐오를 합리화한다. 삶도 벌의 기간이라면 굳이 죽음을 또 두려워할 건 뭐란 말인가, 우리가. 삶이 축복이니까 말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건 아닐까. 그러니 사는 동안 비관하지 말으라고 어려워도 잘 살아내 보라는 격려로, 죽음 뒤의 일이야 어차피 신의 영역이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을 긍정하신다. 병도 죄 때문은 아니라고, 고쳐주셨다. 육신이 죽는 존재라는 인류의 운명, 역사의 유산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므로 더 두려워진다. 이럴 때 공포마케팅에 휘둘릴 수 있다. 공포마케팅은 금융업계와 보험업계의 주특기인데 사이비 종교업계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떨치는 상품이 된다. 문화와 종교는 이렇게 타락한 문화의 한 예가 된다.

인간은 신에게 벌 받으려고 태어나 벌 같은 인생을 살다가 벌을 받으며 죽는 하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S교수와 의기를 모았다. 성경의 말씀들은 인간에 대한 축복과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으로 가득차 있다고. 옳고 그름 논쟁이 병을 고쳐주지 못하니 병에는 예방과 치료가 우선이라고. 개인은 바이러스 피하며 생활도 잘 해나갈 위안거리를 찾고, 사회는 쓸데없이 병에 대한 희생양 찾지 말고 병을 물리치는 일의 연대를 단단히 하는 게 기본이라고. S교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도 좋은 치료법들은 연구가 진행 중일 것이다. 더 오래 좋은 삶을 건강하게 나누도록 성공하는 날도 올 것이다. 아직은 아니어도 이미 진행하는 중이니, 봄 고개 너머에 당도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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