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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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책을 읽는 일은 여행을 하는 일과도 같다. 특히 스토리가 있는 글은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현실을 떠나 책 속의 상상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아름다운 상상을 일으키게 해주는 책으로는 역시 동화가 최고다. 동화는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엔 어른들도 현실을 잊고 순수함에 빠져볼만 하다.

스웨덴의 국민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지은 ‘말괄량이 삐삐’(원제는 삐삐 롱스타킹-Pippi Langstump)는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는 동화다. 주근깨 투성이의 아홉살 난 여자아이, 언제나 짝짝이 스타킹과 긴 구두를 신고 있으며 부모도 없이 얼룩무늬 말 한스와 원숭이만 데리고 살지만 걱정이란 없는 아이, 제멋대로의 행동거지와 예측 불가능한 돌출 행동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다. 학교를 갈까 말까. 말과 원숭이를 데리고 살까 말까,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고 생활하는 아이, 어른의 도움없이 자기결정권을 가진 아이가 바로 ‘삐삐’다.

‘삐삐’의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스웨덴 정부는 2002년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문학활동을 하는 작가를 선정하는 이 상은 50만 달러(약 6억1500만원)라는 상금의 규모도 크지만, ‘스웨덴 국민이 세상에 주는 상’이라는 별칭만큼 운영을 객관적으로 하여서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올해 이 상의 수상자로 백희나 작가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그림책 ‘구름빵’과 ‘달 샤베트’. 물론 한국인으로선 최초의 수상자다. 심사위원단은 “백희나의 영화 같은 책들은 고독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아찔하며 예리하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2004년 출간된 그림책 ‘구름빵’은 이미 뮤지컬로, TV 애니메이션으로, 아동극으로 다양하게 가공돼 한국의 어린이들에겐 익숙한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을 옮겨보면…

“비가 오는 날 산책을 고양이 형제는 산책을 나섰다가 나뭇가지에 걸린 구름을 발견한다. 형제가 구름을 집으로 가지고 오자, 엄마는 구름을 반죽해 빵을 만들어 준다. 빵을 먹은 아이들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게 되고, 아침을 거른 채 허둥지둥 출근한 아빠가 걱정이 돼 아빠에게 구름빵을 가져다 준다”는 얘기이다.

두 번 째 창작동화인 ‘달 샤베트’는 “무더운 여름날 밤, 전기를 너무 많이 써서 정전이 되자 달마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자, 아파트에 사는 반장 할머니는 녹아내린 달로 ‘샤베트’를 만들어 더위를 잊게 해준다. 한편 달이 사라져 버려 옥토끼가 살 곳이 없게되자 달맞이꽃으로 달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재미있는 생각으로 따뜻한 가족애와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이 책들은 일반 동화와 달리, 인물 등을 직접 그리고 만들어 사진으로 찍는 등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그림책이다.

백 작가는 이미 이 책으로 200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수상을 했으며 책은 프랑스·일본·독일·노르웨이 등 세계 10여국에 수출됐다.

그런데 수상소식이 알려지자 정작 작가는 기쁨 못지않게 그동안의 어려움과 섭섭함을 토로한다. 수상작인 ‘구름빵’이 10여개국에 번역 출간돼 인기를 끌고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되면서 그 가치가 4400억원 상당하지만 작가에게 돌아온 수익은 고작 1850만원 정도였던 것. 그것은 신인시절 저작권을 일괄 양도한다(매절계약)는 계약상 내용 때문이었다. 백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해 소송을 진행했으나 1심에 이어 지난 2월 치러진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소송에 지쳐 ‘살아만 있자’는 심정으로 고국을 떠나 태국에 머물면서 창작활동도 하지 못했는데 상을 받게 되어 뜻깊다는 작가는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싸움이겠지만, 후배 신인 작가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한다.

지난 해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저작권 양도 문제로 수상을 거부한 것도 바로 작가의 지적재산권 때문이다. 콘텐츠가 재산이 되는 사회에서 작가의 지적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 해도 세계에 자랑할 수 없다. 독자의 양심으로 작가를 존중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백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며, 백 작가가 하루빨리 회복해 더 좋은 동화로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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