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 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이 충 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2. 민족교육 제도의 창설

●귀국 방해

1946년에는 이미 재일조선인 사이에 귀국보다는 일본 재류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교육적 자세를 일시적인 국어 강습회에서 본격적인 학교 건설로 전환케 하는 유력한 계기가 되었다. 재일조선인의 교육은 항상 미·일 지배계층의 국제정치 존재 방식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았는데, 그 조짐은 아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귀국 제한→민족교육 태동의 경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한반도의 광복은 재일조선인에게는 귀국의 자유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패전 당시 재일조선인은 약 240만 명에 달했는데, 강제 연행된 노동자는 혈혈단신으로, 일반 조선인들은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귀국을 서둘렀다. ‘가자! 조국으로!’가 재일조선인의 표어가 되었다.

이 귀국 업무를 주체적으로 조직한 것은 조련으로 인양자 명부 작성, 귀국증명서 발행, 승차, 승선 알선 등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도 재일조선인은 자신의 문제 해결에 주체적으로 대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선박을 통제하고 있던 조건으로는 항구까지 귀국자를 수송한다 해도 거기에서부터 승선을 준비하는 데는 애로점이 있어서 그 해결을 위정자에게 강력히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치안 당국자조차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조하게 귀환을 서두르는 조선인이 각지에서 승선지인 하카타(博多), 센자기(仙崎), 사세보(佐世保 )로 모여들었다. 승선지에서는 이들 모두를 수용할 수 없어 대혼란의 양상을 나타냈다. …종전과 동시에 이들 조선인의 대다수는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돈이 있는 자는 몰래 배를 구입하여 일찍이 자력으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귀환할 방법이 없어 그저 왁자지껄 떠들면서 매일같이 관계 당국에 진정하고 항의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중에 귀국을 희망하는 집단 이입 노무자의 동요가 매우 심하여 귀국을 희망하는 분쟁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재일조선인의 귀국 요구에 눌려, 미점령 군과 일본 정부는 인양계획을 세우고, 강제연행된 노동자 및 군무원·군인을 우선 수송한 후 일반 조선인을 수송하기로 했다.

그 순위는 홋카이도나 도키와(常盤) 지구의 조선인 노동자가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폭동화’되어서 미군이 출동했던 상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치안대책의 관점에 의해 결정되었다. 더욱 성가신 자를 먼저 쫓아낸다는 것이 그들의 자세였다. 그

렇게 하면서 구체적인 수송방식은 조선에서 일본군이나 일반 일본인을 수송한 귀국선으로 다시 재일조선인을 송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을 인양하러 간 배를 돌려서라도 재일조선인을 위한 귀국선을 특별히 배려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는 재일조선인의 귀국 요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46년 3월 말까지 인양원호국 통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94만 명, 그밖에 통계 누락자는 40만 명, 합계 134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귀국했다. 통계에서 누락된 귀국자는 정부의 인양선을 타지 않고 자력으로 돈을 마련해서 귀국한 자로 보면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귀국선을 기다리는 동안에 여비를 모두 써 버리고 무일푼이 되어 할 수 없이 생활을 위해 일본에 남아 일하는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귀국 순위가 늦은 자들이었다. 일본 정부는 재외 일본인의 인양 문제에는 전력을 다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의 귀국 보장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이것이 귀국을 희망하는 재일조선인을 다시 일본에 재류시킨 한 요인이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을 인양하고 있던 남한에도 귀국을 재고시키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 자체가 불충분했던 ‘조선인을 인양하는 정책’, 게다가 ‘일본 정부가 조선인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았던 것은 고의라고 볼밖에 없었던 그런 방해들을 물리치고 귀국하였지만, 거기에는 미점령군의 조선 식민지 통치라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용어는 영어로 되어 있고, 실업·식량부족·외화 부족이라는 남한 경제의 구조적 왜곡을 나타내는 3대 특징이 싹트고 있었다. 게다가 재일 미점령군은 귀국 조선인이 재산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제한했다(30관 이내의 화물과 1000엔 이하의 현금).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남한으로 돌아가더라도 집이나 직업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 귀국을 일시 보류한 조선인도 많아졌다.

●재일조선인의 일본 동결

위정자는 1946년 초에 강제연행되었던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귀국이 종료되었으므로 다음으로 일반 조선인 차례라고 보고, 3월에 귀국 희망의 여부 등록을 완료시켰다.

그때 65만7천 명의 재일조선인 중 79%에 달하는 51만 4천 명이 귀국 등록을 했다. 이것에 관한 미점령군은 잔류 희망자 13만 3천 명에 대해 출항까지의 여비 무료 등 귀국 ’특권‘을 취소함과 동시에 귀국 희망자에게는 “일본 정부가 지시한 시기까지 출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일본 정부가 비용을 지불하는 인양 특권은 상실되고, 상업 수송의 편의가 가능해지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라고 명령했다.

일본 정부가 지시하는 기한은 1946년 9월 말까지였으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남한으로 맨손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있으므로(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00엔 이하, 짐 30관 이하의 귀국 조건을 붙여) 이미 남한의 실정을 전해 듣고 있던 귀국 희망자들의 실제 귀국은 격감하여 1946년 4월부터 12월까지 약 8만 명이 귀환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서 미점령군은 1946년 12월까지 돌아가지 않는 자들은 인양 포기자로 간주하고, 그해 12월15일에 인양계획 완료의 지령을 발했다.

1946년 12월 현재, 재일조선인은 공식적으로 52만 5천 명이 재류해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재일조선인의 귀국이 단절되고 일본 봉쇄를 강요받았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1947년에 들와서부터는 심사를 받고 지자체장의 귀국명령서를 받은 자가 개별적으로 자비로 귀국하는 시스템이 새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9월이 되자 재한미군의 요청에 따라 중단되었고, 겨우 조선 미군정청이나 맥아더 총사령부의 허가를 받은 자만이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은 광복이 되었음에도, 실제로는 귀국할 자유마저 제한당하였다.

실제로는 일본 국민은 자국민의 인양 문제에 매달려 이러한 재일조선인 인양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본인의 인양 체험은 전후사상(戰後思想) 안에 편입되었지만, 거기에는 재일조선인 인양→일본 재류의 사실이 갖는 의미를 제기하는 시각은 아직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조선 광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재일조선인의 인양 열차에 반감을 던지는 상황까지 나타났다. 재일조선인이 횡포를 부린다고 보는 일본인의 전후적인 편견이 일찍이 생겨나 전전의 편견 위에 덧칠해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일본과 남한 점령, 덧붙여 일본 정부의 방해정책에 의해 실질적으로는 1946년 봄부터, 정책적으로는 1947년부터 60만 조선인이 일본 내에 동결되었다. 조련 제3회 전국대회(1946년 10월)는 ‘항구적인 재류 동포 50만 이상 예상’을 이미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본 재류라는 전후의 새로운 상황은 상반되는 이중의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과 관련되었다.

첫째, 재일조선인은 새로운 상황에 따라 본격적인 교육 건설 작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조선인의 교육 실정’이라는 앞의 문서는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은 완전히 광복된 것은 아니었다. 인양 자를 위해서는 집도 없고 일터도 없었으며, 자식들은 점점 부랑아가 되어 갔다. 이 암담한 현실에 마음을 단단히 다져 먹은 조선인은 마지못해 일본에 주저앉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귀국을 단념한 조선인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녀교육이었다. 문맹을 강요받고, 그 때문에 더욱 멸시당하고 박해받아 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녀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열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의무교육에 익숙해진 일본의 위정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 재류를 각오한 부모들은 동화교육과 배우지 못함으로써 받은 고통을 아이들이 동일하게 맛보지 않도록 조선인학교 창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다른 한편, 둘째로 미점령군은 재일조선인 동결을 기회로 그 통제에 나섰다. 1946년 11월 12일, 인양을 거절한 조선에 대해 “일본 국적을 그대로 보유”한다고 알리고 이에 대한 재일조선인의 항의를 억눌러 잠재웠다.

미점령군은 ’조선인의 지위 및 취급‘에 대해서, “인양을 거절하고 이(일본) 나라에 머무는 길을 선택한 조선인은, 계속 일본에서 거주하려면 모든 지방적 법률 및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 후 선택한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이어 “적당한 지방적인 법률 및 규칙의 준수 의무를 조선인에게 면제해 주는(재일조선인에게 유리한) 이와 같은 차별 대우는 일종의 치외법권을 만들어 내게 되므로 이는 어떤 식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통고했다.

결국, 일본 재류 조선인을 1946년 12월 15일 인양계획이 완료된 시점 이후에는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구별하지 않고‘ 단속한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이다. 이 지령은 점령하 재일조선인을 통제하는 근본 법규로 작용하였고, 1948년 이후의 조선인학교 폐쇄의 근거로 작용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 귀국 제한과 일본 잔류라고 하는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상황은 나아가 1946년경에 민족교육에 열중하는 쪽과 이를 억압하는 쪽으로 두 대립 세력을 만들어 냈다.

●조총련의 결성과 그 교육지도(1)

재일조선인의 교육 활동은 일본의 패전 직후의 서당식 국어강습회로부터 시작하여, 1946년 4월부터는 상·중·하의 3년제 소학교 형식(’초등학원‘이라고 함)으로 옮겨지고, 계속해서 1947년 신학기부터 6·3제의 소·중·고에 사범학교를 두는 형태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 6월에는 「교육규정」을 제정하고, 교육의 행정과 운영의 전반적인 방침을 확정, 전국의 조선인학교에 공통된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제도적 관점에서 보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1년 반의 전사(前史)를 거쳐 1947년 신학기 시점에서 체계와 통일성을 갖춘 학교제도로써 창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민족교육 창설을 지도한 것이,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는 기관으로 설립된 조련이었다. 이 조련은,

⓵ 재류 동포의 권익 옹호와 그 생활 향상을 기한다.

⓶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신조선 건설에 공헌을 기한다.

⓷ 세계 민주세력과 제휴하여 세계평화에 공헌을 기한다.

라는 기본강령을 내걸고 발족, 광복된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유일한 재일조선인의 자주적인 조직으로, 재일조선인의 7할 정도를 결집한 단체였다. 광복으로 재일조선인은 결사의 자유를 되찾고, 그것은 민족교육의 성립·발전에 조직적인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조련의 결성에 즈음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패전 후의 일본의 사회의 상황이 재일조선인에게는 간토(관동 1923년)대지진 때의 불안을 상기시켰고, 그로부터 방위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조총련의 한덕수(韓德銖)의장은 그 결성의 동기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패전 후 “우리 일본제국은 너희 조선인에게 진 게 아니다. 뒤에 두고 보자”라는 협박성 말을 던지는 일본인도 이었다. 일본 정부와 점령군은 조선인에 대한 일체의 대책을 알려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와나(桑名) 시에서는 조선인 징용공이 참수되고, 교토에서는 제대 군인이 조선인 일가 6명을 죽였으며, 지바에서는 특고(特高)가 조선 청년을 학살하는 사건 등이 일어났다. 또한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폭발사건이 일어나 다시 불안과 동포의 시대(지난날 간토대지진)가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이 때문에 광복 후에는 “재일조선인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민족적 자각을 높이고, 노동 의욕을 가지면서 생활하는 조직을 서둘러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덕수 의장은 다른 좌담회에서 당시 “조선인의 뇌리에는 지진 때 대량학살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즉시 다시 떠올랐다. …그 때문에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은 자신이 지켜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조련 결성의 계기를 밝히고 있다.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는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을 표현하는 조선인의 모습에 반감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것을 건방지다, 복수하겠다며 폭행까지 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명확히 광복된 민족으로서의 조선인에 대해 생겨난 새로운 전후적 편견이었다. 이러한 분위 속에서 특히 1945년대 전반에 조련에 결집한 재일조선인의 활동은 고립된 채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 결과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거기에 동정한 자 이외에는(조련의 활동을 지지한 자/인용자 주) 거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일본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분투하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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