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주 제천시문화복지국장

남경주 제천시문화복지국장

[동양일보]강산이 다섯 번 변했지만 아직도 뇌리에 각인되어 가끔은 그때의 아픔이 되살아나곤 한다. 사건에 대한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벌떡 일어나 잠에 빠지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51년 전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마을은 지명(山谷)만큼이나 골이 깊고 산이 높은 아담한 중간터에 60호정도의 정겨운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또 그만큼 가난해 하루 끼니와 땔감을 걱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당시 굶주림을 잊기 위해 몸을 데우려 군불을 자주 때다 보니 마을 주변의 산은 온통 민둥산이었다.

음력 정월대보름날, 사건이 터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버지는 오전에 땔감을 한짐 구해오시고, 오후에 동네분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약주를 자셨다. 이튿날 오후까지 세상모르게 주무셨는데, 오후 2시쯤 면사무소 직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다짜고짜 “산림보호법위반으로 경찰서에 고발 조치했다. 벌금을 내든가 구류를 살던가 결정해라”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 시절에는 온통 벌건 민둥산이 많아, 정부는 삭정이라부르는 큰 나뭇가지의 썩은부분, 고주박, 잡목(풀)외에는 벌목을 일절 금하는 등 산림법이 무척이나 엄격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불쏘시게 용의 순간 화력이 좋은 솔잎 두 짐과 이듬해 집을 짓기 위해 심산을 헤매셔서 해 오신 서까래 재목 8개를 귀신도 모르게 숨겨놓으셨는데 참으로 모를 일이다. 어느 마을이고 꼭 동네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밀고자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이 신고한 것이었다. 2주일쯤 지난 후 면사무소 직원인 산감과 면지서의 경찰관이 찾아와 아버지께 “기한 내 벌금을 납부하지 않아 구류당해야 한다”며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목놓아 우시면서 “너는 이다음 저런사람! 꼭 면서기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뒤를 쫒아가니 아버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에 가라며 야단을 치셨다. 서럽고, 무섭고, 속이 상해 어린 마음에 큰 상처가 되어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창 하신지 사흘째 되던 날 어머니와 면회를 갔더니, 33㎡남짓한 공간에 아버지께선 20여명과 추위에 떨고 계셨다. 그리곤 집으로 가라고 역정을 내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아들아! 넌 이다음 꼭 면서기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 말씀하셨다. 나약한 아비의 모습을 아내와 자식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역정을 내셨을게다. 열흘만에 수척한 모습으로 집에 오신 아버지는 며칠을 크게 앓으셨다. 이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원래 꿈은 교사였지만, 이 사건으로 면서기가 대단한 직업이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면서기가 되자고 마음먹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80년, 체신청 산하 우체국에 발령을 받아 근무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드디어 면서기관으로 합격해 벌써 40년째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면서기 할 것을 그렇게 바라시던 아버지는 1980년 1월 15일 한을 간직하시고 못오실 길을 떠나시고 말았다. 자식 놈이 면서기 하는 것을 보시지 못한 채 떠나신 것이다. 잘 계시는지요? 아버지가 바라시는 대로 면서기도 해보았고, 산감의 대장격인 면장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퇴직을 몇 달 앞두고 제천시청 문화복지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 그렇게 깊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비록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잠자리 만큼은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했습니다. 아버지! 천상에서도 땔감준비 하시다가 산림법 위반으로 구류를 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또 지게를 지시고 몇 십리를 왕복하시는 고생은 없으시겠죠? 그립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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