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박사

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박사
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박사

 

[동양일보]●조총련의 결성과 그 교육지도(2)

조련은 자력으로 자신의 진로를 타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강령 제2항에 집약된 바와 같이 재일조선인 전체의 사상개조를 불가결한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교육사업을 중시하고, 여기에 힘을 쏟았다.

결성대회 민족 강화의 방침 내고, 계속 2전임대회(二全臨時大會; 1946년 2월)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학교가 설립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민족교육과 청년교육의 강화’를 결의하였다. 여기에 기초하여 1946년 신학기부터 3년제 초등학원과 간부 양성을 위한 청년학원을 발족시켰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부 안에 초등교재 편찬위원회를 두어 교과편성을 정하고, 교과서를 편찬하고 학교 교육내용의 통일성을 보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만들기’의 대중운동을 북돋웠다.

재일조선인은 생활의 불안 귀국 가능성에 대한 불안, 일본인에 의한 보복의 불안에 휩싸여 있으면서, 물자 부족과 통제경제의 한복판에서 누구의 원조도 없는 제로 상태에서 민족교육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학교 만들기’ 운동의 경우, “돈 있는 자는 돈으로, 노동력이 있는 자는 노동력으로, 지혜 있는 자는 지혜로, 우리의 학교를 세우자”라는 표어가 확산하였다.

결혼반지나 간자시(비녀 비슷한 것)를 기부한 할머니, 단벌의 오버를 팔아서 기부한 지식인, ”현해탄(대한해협)을 건널 때는 빈손이지 않았던가!“라면서 기부하는 상인, 공사에 가담한 노동자들…. 일본 정부로부터 한 푼의 지원도 받지 않고 조선인은 이처럼 자력으로 학교를 세웠다. 당시에는 통제경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건 관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학교 건설을 위한 자제구입 등의 허가를 받을 때도 관청이 떱떨름해함면서 꺼리는 악조건까지 어려움이 중첩되었다. 또 ‘학교 만들기’와 병행해서 ‘교과서 만들기’가 추진되었는데, 이 또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참고할 만한 조선의 자료도 없었고, 견본으로 삼을 만한 조선어 교과서도 없는 형편에 고심하면서 먼저 등사판으로 교과서를 찍어 내고, 점차 오프셋 교과서로 바꾸어 나갔다. 이때에도 교과서 내용을 미점령군에게 검열을 받아야 했다. 용지는 일본 관청에서 배급을 받아야 하는 제약이 가해졌다.

예를 들면 검열로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수록한 상당수의 교과서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1948년 4월까지 92점, 100만 부의 교과서를 간행할 수 있었다.



●민족교육의 체계화

이와 같은 조련의 지도와 대중의 요망이 통일되어, 1946년 9월 현재 525개 초급학교(아동 42,182, 교사 1,022), 4개의 중학교(학생 1,180, 교사 52), 12개 청년학교(학생 714, 교사 54)의 학교 망이 창설되고, 조선어 교과서를 사용하는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육에 거는 재일조선인의 깊은 사려의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1946년 후반이 되면서 귀국이 곤란해지자 이러한 조선인학교 창설 운동에 열중하는 태도도, 귀국에 대비한 교육에서 나아가 보다 긴 전망 위에 서서 민족교육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귀국을 전제로 하여 국어 습득을 중심으로 했던 과거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검토·개정하여, 항구적이고 합리적인 교육방침”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조련 3전대회는 ‘교육과 계몽’을 4대 방침의 하나로 들고, 그 대강을 정하여 1947년 신학기를 기점으로 하여 민족교육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갔다.

먼저 교육방침의 확립이 시도되었다, 1947년 1월 조련은 ‘교육강령’과 ‘교육의 기본 이념’을 정했다. 민족교육 창설 시기의 사상을 간결히 표명하고 있었으므로 그 문장을 여기에 옮겨 본다.



△교육강령

1. 항구적인 교육정책을 세우자.

2. 교육 시설의 충실과 교육내용의 민주화를 철저히 수행하자.

3. 일본교육의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자.

4. 교육행정을 체계적으로 세우자.

5. 교육재정을 확립하자.



△교육의 기본 이념

1. 전 인민이 잘살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르치자.

2. 세계사의 관점에 서서 애국심을 키우자.

3. 실생활에 토대를 두고 예술감상과 창작활동을 독창적으로 발휘시키자.

4. 노동의 신성함을 일상생활과 학습을 통해 체득시키자.

5. 과학기술에 대한 정력적인 탐구심에 불을 붙여 주자.

6. 과학·노동·경제 현상의 사회 관련성을 구명시키자.



다음으로 소위 일본의 학교교육법에 해당하는 ‘교육규정’을 제정하여(1947년 6월) 조선인학교 조직운영의 세칙을 정했다. 거기에서 (1)조련 문교국(文敎局)이 중앙집권적으로 학교를 지도하고, (2)학교는 초등학교·중등학교·사범학교의 3종을 세우고, (3)그 경영은 운영회 또는 관리 조합이 담당한다는 제도적 골격을 정했다. 또 (4)교육의 자격·신분·권리를 명확히 하고, (5)학생의 입학·수업·졸업과, (6)교수 과목 및 교수시간, 행사 등도 명문화했다.

여기에는 예를 들면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중심이 되는 3월 1일과 8월 15일을 애국의 날로 삼는 당연한 특색과 중학교 입학 자격을 초등학교와 일본인 소학교 졸업생으로 하는 재일조선인 학교의 특징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창설 당시의 교육내용 구성을 살펴볼 자료로써 초등학교 교과목과 교수시간표를 다음 <표>와 같이 소개해 본다.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조선인으로 키우겠다는 염원이 잘 담겨 있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전국의 조선인 학교는 통일된 교육과 운영을 보장받게 되어, 소위 민족교육에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아가 학교의 재정적·교육적인 기초를 단단히 하는 조직이 새로이 발족 되었다.
 

 

표1 초등학교의 교과목과 교수시간표



즉 1947년 여름에는 학교관리조합이 만들어지고, 그때까지 학부모가 부담하던 학비를 학구 내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민족교육 작업이 모든 재일조선인의 공동사업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또 같은 시기에 ‘재일조선인교육자연맹’이 결성되어(가맹자 1400명) 조선인 교육의 충실, 교사의 생활 안정, 교사의 실력 향상, 일본인 교사와 연대 등을 도모하였다.

이런 중에 지금까지의 학교를 통합·재정리 하면서 1947년 신학기부터 6·3세 학교로 발족시키고, 같은 해 10월까지 초급학교 541개 교(아동 수 56,961명, 교사 수 1,250명), 중학교 7개 교(학생 수 2761, 교사 수 95명), 고등학교 8개 교(학생 수 358명, 교사 수 59명)라는 발전을 보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체계화된 방침과 제도와 재정을 갖춘 본격적인 민족교육이 성립된 것이다. 패전 직후의 혼란과 물자 궁핍의 와중에 오직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만큼 사업을 이루어 낸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는 광복으로 회복된 교육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자각과 민족교육에 거는 커다란 기대였다. 그리고 생생하게 고동치기 시작한 민족 재생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은 자주독립의 능력을 갖춘 국민임을 일본 국민의 눈앞에 증명해 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일본 지배자의 허위선전을 사실로써 분쇄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조선인 학교

이처럼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조련의 지도하에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와 별도로 ‘민단’ 산하에서 소수의 조선인 학교가 세워졌으므로 언급해 보기로 한다.

당초에는 민단은 조련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탈퇴한 사람들로 결성되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당시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의된 조선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찬반론의 쟁점이 되었다.

거기에는 조선 건국노선에 대한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 조련을 탈퇴한 사람들과 그 외 사람들은 1946년 10월에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을 결성했지만, 치안 당국의 관찰에 의하면, ‘조선 미군정청 일본 총공관과 연락’을 취해 각 지부의 지도를 담당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한 지배자의 노선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2년 후 대한민국의 창설로 명칭을 ‘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변경하고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한다“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그 지도부는 반공 노선으로 재일조선인 대중의 조직화를 시도하였다.

민단의 지도부가 어떠한 방침과 노력으로 산하에 있는 학교를 운영하고자 하였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여기에서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 단지 한 일본인 당국자는 ”이곳에서 대부분 남한의 미군정청이 발행한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고, 학교에 따라서는 조련이 편찬한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만약에 이 말대로라면, 민단 독자의 교육 창조의 방향과 역량은 매우 결핍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학교 보급이라는 점에서도 조련의 학교에 미치지 못했음은 다음 <표>에 잘 나타나고 있다.
 

 

표2 민단계 학교와 조련계 학교의 비교



그러나 이러한 학교조차도 후에 언급하게 될 2회에 걸친 조선인 학교 폐쇄령에 따라 민단계의 여러 학교에서는 일본학교로 전학하는 자가 속출하고 민족교육 시설은 쇠망의 일로를 걸어, 지금은 겨우 몇몇 학교만 남아 있을 뿐인 상태가 되었다(1970년대). 도쿄·교토·오사카의 세 지역의 한국학원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20년을 넘지 못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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